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성군 (문단 편집) == 역사·경제 == 동관리, 삼봉리 등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만강 유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숙신, 읍루, 예맥, 옥저, 부여, 말갈 등 부족국가들이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속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가 차지하였다가 발해 건국 이후 동경용원부에 소속되었다. 926년 발해 멸망 이후에 온성은 중국 요, 금, 원의 지배 하에 있었다. 조선 초 세종 시기 김종서 장군의 [[4군 6진]] 개척 당시에 다시 한민족의 영역이 된 곳이다. 그리하여 온성도호부로 명명되었고 진이 설치됐다. [[신립]] 장군이 1583년 온성부사로 근무했던 기록이 있다. 당시 1만 [[여진족]]을 불과 500기의 갑사로 격파해서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남만주철도]]와 이어졌던 곳이 [[함북선]] [[삼봉역]], [[함북선]] [[남양역]], [[함북선]] [[훈융역]]이었다. 각각 룽징시 카이산툰(開山屯 : 개산둔)진, 투먼시, 훈춘시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철교들은 다 작살나고 남양역 - 투먼역간 철교 하나만 달랑 남았다. 현 온성읍 근처에 도로다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 역시 박살. 현재 [[만주]]와 연결된 다리는 남양과 삼봉에 하나씩 있다. 대부분의 물동량은 남양을 통하고 삼봉 방면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청진시]] 방향으로 가는 물동량을 수입하기엔 [[함경북도]]에서는 꽤 큰 도시인 [[회령시]]가 버티고 있다. 온성군은 원래는 북부에 위치한 군답지 않게 조그만 군이었으나,[* 북부는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덩치가 큰 군들이 많다.] 이웃한 [[종성군]]을 찢어서 나눠먹어서() 커진 것. 원래는 면적이 430 km^^2^^에 불과했으며, [[함경북도]]에서 가장 작은 군이었다. 현재 함경북도에서 가장 작은 군은 [[화대군]](면적 480 km^^2^^). 끊어진 다리들 중 온성다리는 가장 가까운 마을인 양수진(Liangshuizhen, 凉水镇)에서도 무려 5km 가량을 걸어 들어가야 하니, 개인이 가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실 볼 것도 없다.~~ 훈융다리는 투먼에서 훈춘 가기 전에 있는 상솔만자둔(Shangshuaiwanzitun, 上甩湾子屯)과 가까워 관심이 있으면 가볼 만 하다. ~~그런데 저쪽 대안이 언덕이라 군인들밖에 안 보인다~~ 여담이지만 훈융다리는 강 중심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간 부분이 끊어졌기 때문에, 여기까지 가면 공식적으로는 '''국경을 넘는다.''' 북한에서는 코로나19 발발 이후 전염병을 구실로 탈북과 밀수를 근절시킬 생각으로 2022년 기준 '''[[https://www.asiapress.org/korean/2020/10/society-human-rights/korona-13/|북한 내부에서는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국경에 접근하면 아무나 사살하니]] '''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밀수가 거의 끊겼다가 사람은 오가지 않고 물건만 주고받는 거래가 2022년 하반기부터 다시 등장한다는 보도가 있다. 최북단이라는 점을 빼면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보이지만, [[함경북도]]의 [[논]]농사에서 비중이 큰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 치하에서 [[종성군]]을 흡수하면서 함북에 얼마 없는 평야지대를 상당수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함북에서 온성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평야를 가진 곳은 회령시와 [[경원군]] 정도가 전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