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조왕 (문단 편집)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0&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위말갈|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자두|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신록]]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소서노|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十四年春二月 백성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十四年秋七月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十五年春一月 궁궐을 새로 쌓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十七年夏四月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내다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말(동물)|말]]이 [[소]]를 낳다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二十七年秋七月 대두산성을 쌓다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三十八年春三月 [[농업]]과 [[누에|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무려 65줄. [[백제]]의 모든 왕들 중 기록이 제일 많다.''' 백제 초기 왕들 중에서도 건국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후대 왕들의 기록이 상당히 빈약한데 비해, 가장 오래된 건국 왕의 기록이 상당히 많고 아주 세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감이 없잖아 있다. 비정상적으로 큰 강역과 이해가 어려운 정복 속도를 이유로, 온조왕의 기록이 [[고이왕]], [[책계왕]],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백제)|성왕]][* 남부, 북부, 탕정성, 고사부리성 등 성왕이 설치한 지방행정단위와 매우 유사하다. 더불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의 이름은 창(昌)인데, 거타(居陀)가 거창(居昌)으로 한화되고 고타(古陀)가 고창(古昌)으로 한화된 것을 근거로 그의 이름을 타(陀)로도 볼 수 있고 이는 [[다루왕]]의 다(多)와 상통한다.] 등의 기록과 섞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 참조. 대체로 백제 기록이 [[고구려]], [[신라]]보다 부실한 편인데 유독 온조왕만큼은 비슷한 시대의 고구려, 신라의 초기 군주들과 비교해 봐도 아주 세세하고 사소한 내용이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 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신라]]는 [[문무왕]]이다. 보장왕과 문무왕은 책이 각각 2권씩이나 되는 유이한 왕들이며 《삼국사기》엔 문무왕, 보장왕 순으로 기록이 많은 TOP 1, 2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