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옹정제 (문단 편집) == [[일 중독|일 중독자]] & 악덕 고용주 ==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룰 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청 세종 옹정제 역시 조선 세종처럼 신하들도 자기처럼 일하길 원해서 이를 강요하다시피한 악덕 고용주였다. 옹정제는 13년 통치 중 선제인 [[강희제]]를 본받아 정무에 주력했는데 이게 도가 넘어서 잠도 고작 4시간밖에 안 자는 정도로까지 심해졌다. 보통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대신들조차 질릴 만큼 철저하게 집무에 임했다. 특히 제위에 오른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순행을 가지 않았고 그저 수도인 북경에서 일만 계속 했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8세에 즉위해 16세에 친정을 시작한 [[아버지]] [[강희제]]나, 팔팔한 청년이었던 25세에 즉위한 아들 [[건륭제]]와 달리, 인생의 장년기인 44세에 즉위해서 황제의 업무를 집행한 시점이 다른 황제들에 비해 늦었음에도 재위 13년 만에 57세로 사망한 것은 과도할 만큼 세심하게 정무를 집행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다시 말해 '''[[과로사]].''' 옹정제는 철저하게 지방관을 관리 감독하고 이중삼중으로 감시망을 펼쳐서, 늘 모반 가능성을 염두에 둬 세밀하게 관리들을 통제했으며 전국의 수많은 관리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빠짐없이''' 읽고 모두 황제 전용의 붉은 먹으로 주석을 덧붙여 써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업무를 보았다. 이를 주접(朱摺)이라 하며, 이후 청 황제 업무의 표준이 되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주접이 많아 청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황제표 공포의 [[빨간펜]]-- 사실 이것은 선제인 [[강희제]]가 도입한 제도였는데 옹정제는 아버지가 만든 이 제도를 매우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한계치까지 인정사정없이 쥐어 짜낸 공포의 황제. 오죽했으면 [[청나라]]의 어떤 문인이 '옹정제 때 관리들 평가를 보면 부지런하고 유능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건 칭찬할 게 못 된다. 그 시대에는 그러지 못했으면 관직 생활을 못 했으니까.'라는 말을 했겠는가. 신하에게도 부담이었지만 이 주접을 통한 정치는 옹정제 본인에게도 엄청난 신체적 무리를 주었다. 옹정제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오는 주접에 모두 친히 답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근면한 황제는 옹정제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정책 관련의 진지한 답변은 물론, 옹정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가운데는 형편없이 일하는 관리에게 [[월급 루팡|'월급만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등 대놓고 면박하는 글까지 있다. 원문에는 '無知(멍청한 놈)', '無識小人(무식한 소인배)', '覽, 笑之(쭉 훑어봤는데 웃기는구나)' 등의 표현들이 있다.[* 다만 잘 하는 부하들은 낯뜨거울 정도로 칭찬했다.] 마치 뒷날 [[조선]]의 [[정조(조선)|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 어찰을 연상케 하는 수준. 이것들을 보면 옹정제는 상당한 [[독설가]]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 입장에선 죽어나는데 내용을 빼먹고 쓰면 나중에 귀신 같이 알아서 그걸로 까고,[* 애초에 날아오는 주접이 하루에도 수십 통이기 때문에 남들 다 쓴 내용을 자신만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써서 진짜로 중요한 내용을 못 보고하면 또 그걸로 욕먹었다. 그런데 어떤 관리들[* 그냥 아무개도 아니고 옹정제의 삼총신 중 하나인 전문경도 했다!]은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 대필을 맡겨서 글을 적절히 꾸며 옹정제를 속이기도 했다니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관리의 철저한 감독, 감시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하루는 왕운금(王雲錦)이라고 하는 신하가 신나게 [[마작]]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마작패 하나가 사라져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자 퇴근해서 그냥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어제 뭐하고 놀았냐?"'''고 묻자 깜짝 놀란 그 신하는 감히 황제를 속일 엄두가 안 나서 마작을 하고 놀았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황제가 '''사라진 마작패를 그에게 던지면서 솔직하게 말했으니 [[살려는 드릴게|이번은 봐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그 신하는 공포에 질려서 그 뒤로는 도박할 엄두를 못냈다는 이야기. 또 한 가지 에피소드로는 형부의 신하가 옹정제를 알현했는데, 황제가 담당하는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어보기에 그 신하는 대충 "잘 돌아갑니다."라고 대답했다. 조금 뒤 황제는 다시 "그래, 거기 부서에 걸린 현판도 잘 있더냐?" 하고 물어봤을 때도 신하는 "예, 제대로 걸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그 관청 건물에 걸려있던 현판을 가져오게 해 그 신하 앞에 집어던졌다. 황제가 '''전날 밤에 측근을 시켜 관청의 현판을 떼어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형부의 현판은 본보기 삼아 한동안 원위치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쯤되면 전근대판 [[빅 브라더]].'''[* 여기까지 보면 조선의 태종, 세종, 정조를 보는듯 하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공신들을 숙청한 데다가 신하들 머릿속과 행동양식을 꿰고 앉았던 인물이고, 세종은 과로는 기본에 신하들을 종신노예급으로 부린 인물인 데다가 신하들이 똘똘 뭉쳐 조작 및 은폐 공작한 사건에 대해 글 몇줄 읽고 수상한 점을 찾아낸 인물이며, 정조는 옹정제처럼 관료들을 불신하여 막후정치를 실시하며 수많은 욕설을 후세에 전한 독설가였다. 게다가 세 국왕들 모두 희대의 천재 군주들이었다. 태종은 조선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관료 출신, 세종과 정조는 희대의 책벌레로 말빨로는 이들을 당할 신하가 없었다. 그나마 태종은 숙청으로 악명높은 이미지와 달리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신료들이나 일반 백성들에겐 의외로 자비로운 편이었고, 세종은 능력만 있다면 인격 따위 상관 않고 등용했으며, 정조는 입은 걸걸해도 처벌까지 참혹하게 행하지는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이들을 모신 신하들은 옹정제의 신하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일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