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옹정제 (문단 편집) == 기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32px-Album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stumes_8.jpg|width=100%]]}}} || 희대의 악덕 고용주였다는 사실과 별로 안 어울리지만 이런 그림도 있다. 참고로 위의 그림은 서양 [[가발]]을 쓴 모습이다. 실제로 옹정제는 [[코스프레]]를 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장의 그림으로 남길만큼 코스프레를 즐겨했다고 한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839875&_rk=EYz&search_head=70&page=1|#1]][[https://arca.live/b/city/48764216?p=1|#2]] 심지어 혼자만 하기 심심했던지 당시 보친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건륭제]]까지 불러다가 동반 출연을 한 모습으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나름 의미심장한(건륭제가 강희제와 옹정제 모두가 인정하는 미래의 천자임을 상징하는) 부자간의 초상화인데, 건륭제가 늘그막에 이 그림을 다시 보고는 구석에 먼저 세상을 떠난 카스틸리오네를 그리워하는 감상평을 썼다.] 위에 소개된 코스프레 그림들을 보면 아무리 중국 천자라도 [[탈모|남자의 주적]]은 피할 수 없었던 듯 보인다. 훈남이었던 옹친왕 시절 머리가 조금 자란 상태의 초상화[[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4/Prince_Yinzhen_%28the_future_Yongzheng_Emperor%29_Reading_a_Book.jpg|##]]를 보면 중년에 황제에 오르고 격무에 시달리며 스트레스성 탈모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변발]]을 국시이자 민족 정신으로 규정한 청나라였기에 탈모 따위 무슨 의미가 있었겠냐마는, 아무리 만주족이라도 현실적으로 매일매일 대머리 깎으며 살 것도 아니고 빛나는 스킨헤드보다는 오늘날의 스포츠 머리 내지는 훈련병 머리로 지내는 기간이 당연히 더 많았다. 물론 대청 황제씩이나 되면 중요한 공식석상에서는 금전서미만 남기고 빡빡 민 후 관모를 쓰는 게 정석이었지만, 옹정제는 오덕이었던지라 관모를 쓰지 않은 엉뚱한 차림으로도 많은 초상화가 남았고 그 덕에 M자 탈모의 흔적마저 전해지고 말았다. 사실 [[변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청나라에선 대머리도 가짜 변발을 붙여야 했기 때문에 황제가 대머리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을 법도 하다. 단지 옹정제 본인의 절대권력 탓에 같은 청나라 황족이라도 옹정제의 대머리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지 못했을 뿐.] 전술했듯,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조서를 위주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2013년에 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되면서 옹정제를 후계자로 정한 것은 강희제 본인이었단 것이 밝혀졌다. 청나라의 야사가 담긴 '청대야사필기대관'이라는 책에 따르면, 옹정제의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를 '노재'(奴才)[* 조금 애매한 번역이긴 하지만 번역하자면 하인이 주인에게 소인이라고 하는 거라 보면 된다.]라고 하는 걸 듣자 엄히 질책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 실수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심지어 정사에서도 나온 기록이다. 옹정제가 왜 한족 신하들이 스스로 노재라고 칭하는 것을 금지시켰냐면 처음부터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재는 황제의 가노(家奴), 포의를 뜻한다. 즉 만주족 신하들은 대대로 청 황제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써도 되지만, 한족 신하들은 피고용인이지 진정한 황제의 사람은 아니기에 노재라고 칭할 자격은 없다고 여겨 그리 일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만한을 가리지 않고 관료들을 '''골고루 불신'''했던 옹정제였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옹정제의 최측근 가신들 중에는 만인 못지않게 한인도 많았다. 강옹건 3대를 섬긴 [[장정옥]]이나 연갱요가 대표적. 또한 전문경이나 이위처럼 진사를 못 따고 연납으로 임용되어 진사 출신자들에게는 낙하산 취급을 받는 한인 부하들도 많았다. 연갱요는 한족이긴 하지만 집안이 한족팔기였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일반 다른 한족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팔기에 편입된 한족도 엄연히 기인 취급을 해 줬기 때문이다. 기인내에서도 만족 몽골 한족 이런 식으로 서열이 존재했고 위에서도 설명되어 있지만, 연갱요 집안은 포의에서 한군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연갱요 여동생이 옹정제의 첩이 된 것만 봐도 연갱요 집안은 팔기에 속하는 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청나라의 귀족이 아니면 궁녀가 될 자격조차 없었다. 팔기 귀족에 딸 중에서만 궁녀를 뽑았기 때문이다. 연갱요는 총독이었는데 총독조차 팔기 출신 기인들만 임명을 했다.] 딱히 만인이라고 함부로 노재라 칭해도 옹정제한테 욕 안 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몸소 수행했으며, 스스로에게 원명거사(圓明居士)라는 호를 붙이기도 했다. 여러 [[화두]]를 타파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경지였다고 하나, 말년에는 [[도교]]의 [[연단술]]에 심취해서 단약을 과다복용한 부작용, 즉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 이는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도사들을 자금성에서 내쫓은 일이 야사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건륭제가 즉위하자마자 여유량의 일족을 주멸하고 증정을 포함한 다른 사상적 관련자들까지 목을 날려버린 일과 엮어 여유량의 딸(또는 손녀)가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와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야사가 생긴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이런 야사들은 건륭제의 후속 조치 때문에 더 수상해보이는 지경이다.] 실제 사인은 비소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검시를 통해 밝혀낸 [[광서제]]의 예처럼 청서릉을 발굴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솔직히 옹정제의 생활 습관으로는 단약이 아니었어도 딱히 오래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평균 수명시간이 위에 나온 것처럼 4시간일 정도로 업무에 몰두했다. 20~30대 한창 나이대의 청년이라도 이러면 건강 해치기 딱 좋은데, 옹정제는 즉위할 때 이미 쉰을 바라볼 시기였다.] 오히려 현대에 비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옹정제 정도만 해도 일찍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옹정제의 치세(1722년 ~ 1735년) 기간은 [[조선]] 왕조의 [[경종(조선)|경종]](1720년 ~ 1724년)의 재위 기간과 [[영조]](1724년 ~ 1776년)의 재위 초반 10년과 일치한다.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 ~ 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년 ~ 1745년)다. 그의 평가는 오늘날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굉장히 좋다.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미래엔)에서도 옹정제가 일 중독자로서 보낸 삶과 증정과 벌였던 쪼잔한 키배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것은 아니지만 __황제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화이사상을 제시__하였다고 서술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