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옹정제 (문단 편집) == 후계자 다툼, 황제 즉위 ==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이자 [[효공인황후|덕비 우야씨]]의 장남으로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 서비나 빈 미만 후궁들이 황손을 낳으면 황후나 빈 이상 높은 후궁이 맡아 길렀다. 봉작되지 못한 관녀(官女)와 함께 서비(庶妃)로 통칭/명나라와 청나라 후궁에겐 품계가 없다.]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 강희 28년(1689년)에 황후로 진봉됐으나 이틀 후에 사망하여 [[효의인황후]]란 시호를 받았다. 효의인황후의 아버지 동국유(1643~1719)는 강희제의 외삼촌이 된다. 따라서 강희제와 [[효의인황후]]는 부부이자 사촌(외사촌/고종사촌) 관계였다.]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를 친자식처럼 총애하며 길렀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이 덕에 효의인황후의 남동생인 융과다가 외숙부로서 옹정제를 물심양면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융과다 역시 옹정제에 의해 숙청됐다.] 청나라 시절 황자들의 교육은 상서방(上書房)이 맡았는데, 강희제는 직접 나라의 특급 인재들을 뽑아 황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옹정제를 비롯한 황자들은 상서방에서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웠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익힘과 함께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익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춘일독서, 하일독서 등 시가를 창작하여 부친을 기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옹정제는 아버지인 강희제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16세 때 공자의 고향 곡부로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 일, 19세 때 부친이 최후의 몽골 제국으로 불리는 [[준가르]]의 갈단 칸을 공격할 때 따라가서 정홍기의 군영을 관장한 일 등 여러가지 일을 거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워 옹친왕(雍親王)에 올랐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eking_Lamatempel_wanfuge-%24.jpg|width=100%]]}}} || || '''{{{#00386a 옹정제가 살았던 옹친왕부, 옹화궁(雍和宫, 융허궁)[* 현재 베이징 최대의 티베트불교 사원이다.] }}}''' || [[강희제]]에게는 아들이 모두 35명이 있었는데 어려서 죽거나 양자로 준 아들을 제외하면 26명이 있었다. 이 아들 가운데서 둘째 아거(阿哥)[* 만주어로 왕자, 황자,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 윤잉(1674~1725)만이 효성인황후가 낳은 아들이었다.[* 윤잉 전에 승호(承祜)란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적장자인 윤잉을 [[강희제]]는 몹시 귀여워했다.[* 윤잉이 겨우 한 살하고 일곱 달이 되었을 때 황태자로 책봉했을 정도다. 위에도 서술했다시피 윤잉은 첫째 황자, 즉 [[서자]]까지 포함시키면 장자는 아니다. 또한 강희제 이전 누르하치-홍타이지-푸린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만주족 통치자들이 황태자라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비록 황후의 소생은 아니지만 서자인 황장자(皇長子) 윤제도 혜비 납라씨 소생으로서 윤잉의 외숙 색액도와 권력을 다투던 납란명주와 인척관계(叔姪인 것으로 생각된다.)로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다.(누르하치 시기에는 적복진이 여럿 변경되기에 불명확하지만, 홍타이지 사후에 마지막 적복진인 오라나랍씨 소생인 도르곤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홍타이지의 장남이자 장성하여 여러 전공을 세운 숙친왕 호격 대신에 5비 중에 막내인 차서궁 장비 박이제길특씨의 소생에 어린 나이에 푸린이 즉위한 것에서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푸린 사후에도 강희제는 장남이 아닌 3남이었음에도 조모 박이제길특씨의 지원을 받아서 등극된다는 점에서도 적자의 개념이 적복진 소생이기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는 그렇게 예뻐한 적장자인 윤잉을 빠르게 황태자로 만들고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윤잉은 강희 36년(1697년) 3차 준가르 원정 때 강희제 본인은 직접 원정에 참전하였고 윤잉을 베이징에 두어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잉은 이때부터 강희제의 신뢰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윤잉은 자신의 심복들을 보내는 등으로 부친의 행동을 관찰하고 탐문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참다못한 강희제는 윤잉을 한 차례 황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감금시킨다.[* 물론 단순히 이것뿐만 아니라 윤잉 자체가 주색에 빠지는 등 막장 짓들을 벌였었다.] 윤잉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쫒겨나자 황자들은 저마다 황태자가 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당(윤잉의 붕당), 황장자당, 황8자당, 황4자당 같은 파당이 형성되었다. 강희 47년(1708년) 9월, 강희제는 황태자 폐위 사건에 연루 된 황태자, 황장자, 황3자, 황4자(옹정제), 황5자, 황8자, 황13자를 연금하였고, 황태자와 황장자, 황13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11월 석방되었다. 황태자를 복위시킬 마음이 있었던 강희제는 11월 14일, 여러 황족과 대신을 불러서 황1자를 제외한 황자들 중에서 황태자를 추천하라 명하였고 악륜대, 규서, 왕홍서, 마제, 동국유 등 황8자당에 속한 많은 대신들이 황8자를 추천하였다. 강희제는 이를 빌미로 황8자가 황장자와 결탁하였으며 당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하였고, 황8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킨 다음 이틀 뒤인 16일 황태자를 석방하면서 황태자 복위 의사를 밝혔다.[* 이게 사실 웃긴 게 청나라에서 이제까지 다음 후계자를 세울 때에 관리들과 상의를 한 적이 없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후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사후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아들들과 조카들 중에서 팔기의 수장이된 사람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열렸고, 강희제는 조모이자 홍타이지의 측복진인 차서궁 장비이며, 순치제의 친모인 박이제길특씨의 지명으로 등극하였다. 다만 관리들의 의견을 잘 청취하던 강희제의 평소 행동을 보고 착각했을 수는 있지만, 왕조시대에 군주가 자신의 후계를 신료들의 의견을 결과에 반영시킬 수는 있어도 이에 따라서 세우지는 않는다.] 그리고 강희 48년(1709년)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강희 51년(1712년) 윤잉은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다시 황태자 자리에서 쫒겨나 함안궁에 연금되고 만다. 이렇게 태자 윤잉은 다시 폐위되었고 능력 있는 황자들이 다시금 황태자 자리를 노리고 황위 다툼을 벌인다. 특히 황4자(옹정제), 황8자, 황14자들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하여간 황자들이 이렇게 다투는 와중에, 옹정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융과다(隆科多), [[연갱요]](年羹堯) 등 자신의 세력은 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견제받을 만큼 크게 파당을 만들지는 않고, 후계자 쟁탈전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늙고 기력이 떨어진 강희제는 말년에 아들들의 이런 행각을 보고 진저리를 치던 바, 옹정제의 이런 태도는 강희제의 마음을 잘 공략했다. 더구나 마침 강희제는 옹정제의 아들이자 뒷날의 [[건륭제]]인 어린 손자 홍력의 귀여움과 똑똑함에 흠뻑 빠져있던 바, 손자에 대한 애정은 옹정제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영락제]]가 손자인 [[선덕제]]를 총애해 그 아버지인 [[홍희제]]에게 다음 보위를 물려준 것과 같다. 하지만 홍희제는 영락제의 적자이자 장남이기에 당연한 후계자이다. 다만 동생들에 비하여서 무른 성격에 군사적인 전공이 없기에 교체의 빌미가 될 수있는 여지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교사회에서 장남이 아닌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면 뒤가 너무 시끄러워진다는 것을 조카를 쫓아낸 영락제가 모를 리는 없다.(조카 건문제 측근에 간신 토벌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건문제가 사라졌다는 명분으로 즉위한 영락제는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이를 자신의 武功으로 채우고자 한 것인데, 또다시 외정에만 몰두해야 하는 경우를 만들기에는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최후까지도 불분명했던 후계자 자리였지만 강희제는 죽기 전에 옹정제를 후계자로 만들어 놓았다. 다만 이 과정은 상당히 논란이었던지라 옹정제의 정적들은 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옹정제는 정적들을 마구 패서 이런 논란을 잠재웠다.[* 앞의 유조가 없어도 사실 조서 위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시 청나라는 공식문서를 한자로만 작성한 것이 아니라 만주어로도 작성했기 때문이다. 조작되었다는 글자는 당시 황실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0황자"라고 표기하는 게 아니라 "황0자"라고 표기하였다는 걸 생각하면, 강희제가 옹정제를 차기 황제이자 후계자로 지명한 건 거의 확실하다. 다만 강희제 사망 당시에 베이징이 거의 폐쇄 상태였다는 점, 옹정제가 후계자로서 강희제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 강희제의 유조 발표 때에도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서 아직까지도 약간의 의혹들이 남아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 평전에서 황장자와 한때 황태자였던 황2자는 부황의 눈 밖에 난 이후이고, 황3자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 외면받던 상황에서 가장 큰 정통성을 가졌던 황4자 윤진(옹정제)이 황위를 물려받는 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아들인 홍력의 총명함이나 쓸데없이 앞에 나서지 않는 옹정제의 치밀함은 부가적이라고 봤던 것. 다만, 황3자 성친왕 윤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능력이 크게 부족하진 않았다. 그는 강희제로부터 기하학을 사사하고, 서양 학문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고금도서집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주로 학술 분야에 행적이 있으니 문약했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게 윤지는 가르단과의 전쟁에 종군하여 다양한 헌책을 내놓아 그 공으로 군왕이 된 사람이었다. 능력은 있으되, 황제로서의 재목은 아니었던 듯 하다. 게다가 윤지는 강희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의 복상 기간 중에 예법에 어긋난 일을 하여 부황의 진노를 사는 일도 있었다.] 이 논란이 사라진 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90501031632032002|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된 2013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