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와하브파 (문단 편집) == 아랍 우월주의적 기원 == 일단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신학자였던 무함마드 빈 압둘와하브(محمد بن عبد الوهاب، 1792~1703)가 주장하고 시작한 이념이다. 사실 와하비즘의 진정한 원류라고 불릴 수 있는 사상은 13세기의 이슬람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의 이슬람 교리 해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븐 타이미야는 [[한발리파]] 율법학자로서 13세기 [[몽골 제국]]의 이슬람 침공 이후 이슬람권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로, 당시 이슬람권의 나라들이 [[몽골]] 침입을 받고 무너진 이유는 이슬람이 올바른 길~~실질적으로는 아랍 우월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수피즘을 신봉했던 [[튀르크족]]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거기다 하필이면(?) 몽골은 아랍인의 영역까지 손에 넣지는 않았다. 물론 아랍인들이 사는 땅들이 대체로 쓸모없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집트는 그래도 좋은 땅이긴 한데 여기서는 맘루크 왕조에게 막혔다. 그렇다고 아라비아 반도로 가자니 거긴 당시로서는 진짜 쓸모없는 땅이고(...)] 최근에 나온 충격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무슬림에 대한 이븐 타이미야의 관점은 그 당시 다른 무슬림 신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한다. [[쿠란]]의 2장 256절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라는 문장을 오늘날의 종교의 자유의 개념과 흡사하게 해석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 종교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논문을 쓴 것도 그였다. 중세에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구절을 그저 과거에 폐기된 명령으로만 간주하는 해석이 우세하던 상황이었다. 비무슬림에 대한 박해나 강제 개종을 주장한 적은 없고, 대신 갈등이 심해질 경우 추방 정도를 제시하는 정도였는데, 14세기 당시로는 특별히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15~17세기 초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무슬림 등을 가리지 않고 추방했다. 특히 막판에 벌어진 모리스코 추방에서는 무려 3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국외로 추방당했다. 어찌나 많이도 추방당했던지 모리스코들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죄다 쫓아내서 스페인의 제조업은 폭삭 망하버렸다. 모리스코 추방에 찬성했던 카톨릭 대주교도 이제 누가 우리 신발을 만들어주냐고 한탄했을 지경. 거기다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라 17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위그노)에 대한 추방도 이뤄져서 30만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추방당했고 이들도 모리스코처럼 제조업에 종사했기에 프랑스의 제조업 130년이 지난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도 회복을 못해 그 때에도 프랑스의 군복이 영국산이었다.] 이븐 타이미야가 극단주의의 뿌리로 알려졌던 이유는 중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아직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영어로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점이나 한발리 학파 외에 다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잊혀진 탓이 크다. 이븐 타이미야는 성격이 완고한 사람이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당대 유명 수피 사상가 이븐 아라비를 사탄의 동반자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하였으며,[* 이븐 타이미야와 대척점에 있던 이븐 아라비는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에 영향을 받았지만 [[알안달루스]](지금의 [[스페인]] 중남부) 출신 무슬림으로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감에 배타적인 태도가 강했던 반면 이븐 타이미야의 경우 기독교나 유대교보다는 오히려 알라위파나 시아파를 더 부정적으로 보던 편이었다.] [[알라위파]]를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보다 더 사악한 자들로 [[지하드]]를 통해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종교를 증오했던 이븐 타이미야였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본 듯하다. 이슬람에서도 이혼 허용을 좀 더 엄격히 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브파 학자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수피도 증오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븐 타이미야는 수피 교단과 친분이 있었다.] 또한 [[맘루크 왕조]]와 전쟁 중이던 [[일 칸국]]의 몽골계 무슬림들이 진정한 무슬림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지하드를 정당화하였다. 이는 후대에 [[지하드]]와 타크피르 역시 일반 무슬림일지라도 정상적인 판단력만 있다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해석되었다.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준 셈이다.[* 정작 수니파가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문제에서 당연히 혈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아파와 대비되게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하기사 이 둘은 이미 얼마 못가 변질되어서 수니파는 정작 우마위야 왕조 시절부터 세습제로 칼리파가 선출되었고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이 죽은 후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알리와 혈연적 연관도 없는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이븐 타이미야 한 명을 딱 찝어서 [[만악의 근원]]이라고 정의하기도 뭐한 게, 그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가 중에서 "'''당대의 이슬람 의학은 지나치게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폐기되어야 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가르쳐준 [[민간요법]] 이외의 의학은 하람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도 있었다는 것.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들이 바보는 아니라서 적당히 [[하디스]]에 나온 민간요법만 눈치껏 책으로 편집해서 내면서, 이슬람 의학 관련해서는 '''아무''' 의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슬람 선교 책자에서 이슬람 중세 의학을 자랑하는 것 때문에 오해할 수가 있는데, 중세 이슬람 의학은 쿠란과 하디스에 바탕을 둔 지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슬람 보수파로부터 자주 의심과 공격을 받던 분야였다. 중세 이슬람 의학의 본좌였던 [[이븐 시나]]는 이단으로 취급 받던 [[이스마일파]]였기에 보수파의 공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의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븐 시나는 자신의 저서에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난교]](...)를 하면 낫는다'고 쓰기도 했다. 정작 이븐 시나가 스스로 상사병 치료 성공 사례로 밝힌 것에는 난교 따위는 없고 그냥 상사병을 앓는 사람의 여자와 맺어주는 것으로 치료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당대 이슬람 국가들의 정권 지도부들이 ~~아랍인이 아니라 튀르크족이라는 이유로~~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도층과 큰 마찰을 일으켜 감옥에 15년이나 있기도 했다. 말년에는 비이슬람 유적들과, 심지어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에서 시아파들이 예배드리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유적지에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면서 파괴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들도 이 주장이 논란이 된다는 걸 알았는지 '우리 스승님은 몇 가지 결점이 있긴 했지만 장점이 훨씬 많았어요.'라면서 얼버무려야 했다.] 이는 나중에 와하비즘과 살라피즘의 각종 문화재 파괴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 이븐 타이미야는 1328년에 죽었지만, 그 제자들[*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쿠란 해설서를 쓴 [[이븐 카시르]]가 그의 제자이다.]과 그의 저작들은 꾸준히 이어진다.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의 샤피이 법학파 학자들도 이븐 타이미야의 저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와하브파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싫어하는 것과 다르게, 이븐 타이미야는 [[알 가잘리]]를 비롯한 이슬람 사변 철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일단 기초적인 수준의 경제학 지식 같은 부분은 공감하는 편이었으며, 비무슬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불에 탄다는 주류 이슬람 학설에 반기를 들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비무슬림이던 무슬림이던간에 최종적으로는 죄가 다 계산되면 천국에 간다는 소수파 관점을 지지했다.] 공격적인 논파 방법이 유명했다. 이 때문에 샤피이 법학파 학자들이 이븐 타이미야의 저작을 종종 참고할 때가 많았다.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을 받은''' 학자 중 한 명이었던 [[이븐 카시르]]는 성경과 꾸란, 하디스 및 과거 이슬람 역사서들을 편집하여 방대한 분량의 이슬람 역사서 및 '''쿠란 해설서'''를 출간해서 히트를 쳤다. 이븐 카시르의 이슬람 역사서는 천지창조, 예언자들의 이야기와 미래의 심판에 날에 대한 서술까지도 포함한다. 물론 그의 이슬람 사상관은 이븐 타이미야에서 전수 받은 것. 결국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은 18세기의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에게 '''직접''' 이어지게 된다. 17~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서는 카디자드파라는 와하브파의 기원이 되는 근본주의파들이 득세하여 다른 무슬림들과 몽둥이 및 칼을 휘두르며 패싸움을 벌였는데, 이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한 말 중에 "아랍어 이외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선이다."[* 아랍어 대신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크]]계 통치자들을 저격하는 말이었다.] 라는 말을 써먹으며 무슬림들이 통역관으로 일하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였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통역관들은 [[파나리오테스]] 그리스인들과 [[세파르딤]] 유대인 중에서 주로 충원되었고, 아이러니하지만 이 덕분인지 이들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엘리트로서 대접받으며 나름 잘 살 수 있었다. 이미 와하브파의 기원인 카디자드파부터가 무슬림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퇴보시키는 상황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간단히 말해 이들의 사상은 [[복고]]이자 [[반동]]이다. 허나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결국 현실의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지 않고 오히려 옛날로 퇴보하겠다는 것이니 경쟁력이 있으려고 해도 있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현실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도 입으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할건 다 하고 정작 무기는 7세기에 쓰는 무기 따위가 아니라 서양에서 만든 총기류를 쓴다는걸 감안하면 얼마나 어이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