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완순군 (문단 편집) === 조선왕조 시절 === 1856년([[철종(조선)|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와공면[*A]에서 [[선조(조선)|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 현령 이신오(李愼五)[*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을경(李乙經). [[조선]] [[왕실]] 직계와는 200년 ~ 300년 전에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단순히 [[왕실]]의 후손이었을 뿐, [[왕족]]은 아니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선조(조선)|선조 이연]] - [[경창군|경창군 이주]] - 창원군 이준 - 청평군 이천 - 서천군 이황 - 이정욱 - 이게 - 이유병 - 이술초[* 이유병의 양자. 이게의 동생 이재의 손자로 이유병과 실제로는 당숙 - 당조카 사이이다.] - 이도본 - 이신응(이신오) - '''완순군 이재완''' 그러나 1864년([[고종(대한제국)|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 뻘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었고, 장차 경창군파의 차기 종손이 될 그의 출계로 인해 경창군 종가는 그의 하나 뿐인 남동생인 [[이재곤(1859)|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 뻘인 먼 친척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조선)|문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흥친왕|친]] [[완은군|형제]]들 및 [[완림군 이재원|사촌]] [[완영군 이재긍|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 이 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대한제국)|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 童蒙敎官. [[조선시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군|곡산]] 부사와 [[춘천시|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 [[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조선)|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와 [[이조(조선)|이조]], [[예조]]의 [[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완림군|이재원]][*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과 함께 경기도 부평[*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인천광역시)|서구]] 및 [[경기도]] [[부천시]] 일대.]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