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작위)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 국제질서가 정립된 [[당나라]] 중엽부터는 더이상 외국 군주에게 별도의 작위를 책봉하지 않게 되었고, 특히 외국의 군주를 책봉할 때에는 '국왕' 표현을 명기하여 자국에서 황족에게 책봉되는 작위인 국왕과는 구분됨을 명확히 했다. 8세기경 [[성덕왕]]·[[강왕]]대부터는 신라국왕·발해국왕으로 부르고 과거처럼 낙랑군왕·발해군왕 호칭도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다만 신라왕이 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던 사례로 인해, 이후 [[고려]]에서는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를 봉호로 삼을 경우에는 [[낙랑공]], [[낙랑후]], [[낙랑공주]] 등의 사례처럼 '낙랑'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라는 [[나당전쟁]] 승리로 당나라의 침략 의지를 꺾었고 발해도 건국 초기에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둘 다 당에게 있어 만만치 않은 나라임을 드러냈고, 당나라와 두 나라가 화해한 이후로는 당나라의 [[빈공과]]를 두 나라가 휩쓸며 당나라에 버금가는 문명국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나라 주변국 중에서도 특별하게 인식되었고 의전서열도 높게 간주되었다. 당은 신라를 두고 [[구당서]]에서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로 일컬었고 [[성덕왕]]에게 보낸 조서에서는 신라를 [[춘추시대]]의 예의지국으로 유명한 [[노나라]]에 비유하고 숙위자에게 비록 명예직이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문관]]직에 임명하는 등 다른 주변국과는 다름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다.[* 권기현, 2020, 「8세기 중엽 신라의 對唐關係 -在唐 新羅人 金日晟 墓誌銘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第35輯, 367~413쪽.] 이러한 높은 인식이 아래에 설명할 고려, 조선까지 대체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