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작위) (문단 편집) ==== [[고려]] ==== 고려는 옛 [[고구려]]의 후계임을 널리 인정받았고 특히 고구려 후기에는 당시 정식 국호가 '고려'였었기에, [[양제(수)|수양제]]의 300만 대군을 격파하고 [[태종(당)|당태종]]마저 정복에 실패한 나라로 평가되었던 것에 더하여, 당대 초강대국으로 평가되었던 [[요나라|거란]]을 격파한 [[귀주 대첩|실제 사례]]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 대우가 남달랐다. [[송나라]]에서는 요나라와 사실상 동급으로 취급할 정도였는데, 이는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서하]]나 [[대월]]과는 현격한 차이였다. 물론 대외적으로 황제를 칭하진 않았지만, 사실 당시 이 나라들이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자주국의 체제라고 불리는 [[외왕내제]]라는 개념이 실상 현실에선 묵시적 승인조차 받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함을 나타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는 작위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고, 신분도 '외국의 군주'가 아닌 황제의 제후이자 황실의 종친으로 바뀌었다. 다만 그 봉토인 고려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취급되었는데, 완전한 원나라의 직할령으로도 볼 수 없고 완전한 별개의 외국으로도 볼 수 없는 이중적인 지위인 '부마국'이 되었으며, 원나라 조정과 고려의 조정은 이런 이중적 지위를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이용해먹었다. 원나라 조정의 요구에 따라 고려는 '천자국의 격식'에 대비되는 '제후국의 격식'을 마련해 관제를 고치기도 했다. 중원 제국과 한민족 왕조의 관계를 '천자국'과 '제후국'으로 엄격히 따지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이다. 그리고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뒤에 [[명나라]]와 [[청나라]]에선 엄연히 '번부(藩部)'가 아닌 '외국'으로 취급되어 예부(禮部)가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대상이었음에도, 천자국과 제후국이라는 관계의 틀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오히려 한민족 지배층들이 [[사대]]의 관념을 심화시켜 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