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작위) (문단 편집) == 서열 == 왕은 원래 군주격 칭호였고, 제후의 작위인 [[오등작]]은 [[공작(작위)|공(公)]]–[[후작|후(侯)]]–[[백작|백(伯)]]–[[자작(작위)|자(子)]]–[[남작|남(男)]] 순의 서열이므로 왕작이면 무조건 공작보다 높을 거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서 잠깐 언급되기도 했듯 왕작이 늘 오등작보다 높았던 것은 아니다. 서양의 [[대공(작위)|대공]]의 경우 동아시아에서 작위 칭호로 쓰인 전례가 없고, 반대로 서양에서는 왕작이 일반적으로 쓰인 사례가 없기에, 대공이 무조건 왕작보다 낮다고 단정지을 수 없고, 오히려 유사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왕작 개념이 최초로 성립된 [[한나라]] 때에도 왕이 무조건 공보다 높지는 않았다. 한나라 때의 공은 [[이왕삼각]]에 따라 옛 왕조의 후예들을 천자의 빈객으로 예우한 경우였거나, [[구석#s-2|구석(九錫)]]의 특전을 받아 천자에게도 예우를 받는 특수한 신분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의전상 서열이 왕보다 앞섰다.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책봉된 뒤에 위왕(魏王)으로 승격한 사례 때문에 당시에도 공이 왕보다 낮은 작위 였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위공 당시에 쓰인 [[헌제]]의 조서에서도 위공의 서열은 제후왕에 앞선다고 명시되어 있다.[* 조조의 위왕 등극은 더 높은 지위를 받아서가 아니라 황족이 아닌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황실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조조는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 승상이건 공이건 왕이건 권한 면에서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명목상 한나라의 신하였기 때문에 한 고조 유방이 세운 원칙에 따라 황족만 임명되는 왕 직위는 내버려둔 것이다. 그런데 조조가 왕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나라의 최소한의 틀조차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으로, 역성혁명의 기틀을 전부 마련해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한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들을 꼽는 망탁조의에 실제 헌제로부터 선양받은 조비가 아닌, 위왕 자리에 멈춘 조조가 들어가는 것이다. 어쨌거나 후한 당시 왕 직위는 공보다 서열도 낮지만, 중요한 상징이 있는 것이었다.] 상술한 대로 오등작이 도입된 [[서진]] 때에는 현왕(縣王)은 군공(郡公)·군후(郡侯)보다 아래 서열이었다. 서진 이후의 [[육조시대|남조]] 때까지 작위의 등급은 작호(爵號)의 서열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보통 봉국(封國)의 규모에 따라 정해졌다. 당시 [[이십등작]]에서 유래된 열후(列侯)들은 오등작 남작보다도 그 서열이 낮았다. 작호의 서열 순으로 작위의 서열이 지정된 것은 북조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작위의 종류나 서열은 근세에 정립된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대와 나라에 따라 운영하고 있는 작위 제도는 모두 다 달랐고,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그 서열도 일률적으로 도식화하긴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