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작위) (문단 편집) === 1자왕의 서열 문제 === 흔히 왕작들 가운데 [[봉호]]가 1글자인 왕을 '일자왕(一字王)'이라고 하여, 왕작 가운데 최고 서열으로 단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디까지나 [[원나라]] 때에 한정하여 옳은 것이다. [[명나라]]의 경우에는 친왕과 군왕이 관제상의 등급 명칭에 불과했고, 관례적으로 친왕은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지정했기에 '일자왕'이 되고 군왕은 옛 군(郡)의 이름으로 봉호를 지정했기에 '이자왕(二字王)'이 된 사례다. 이 두 왕조를 제외한 다른 왕조들에서 1자왕의 서열이 높게 보이는 것은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특히 명나라의 특수한 사례를 다른 왕조에서도 적용하여 1자왕은 무조건 친왕이고 2자왕은 무조건 군왕이라 대입하는 경우도 보이는데, [[청나라]]의 경우 군왕의 봉호도 보통 1글자의 [[존호]]로 지정했다. 이는 '국왕'과 '군왕' 개념을 인지하지 않았기에 발생되는 오류로 보인다. 원래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 읍(邑)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1글자로 썼다. 당시 2글자 지명은 그 읍의 별명이거나, 특정 읍과 그 주변을 여러 구역으로 구분했을 때 쓰인 이름이거나, 다른 읍에 예속된 비읍(鄙邑) 등에 쓰인 경우였다. 전국시대 무렵부터 2글자 지명의 사용이 일반화되었지만, 보통 나라의 국호는 그 나라의 본읍(本邑)에 해당되는 지명을 사용했기에 1글자로 사용되었다. 또한 군·현의 이름 중에도 기존에 쓰인 읍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1글자의 지명으로 쓰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오호십육국시대]]부터 이주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이주민을 정착시킬 때엔 그 정착지에 이주민들의 출신인 주·군·현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행정구역을 새로 설치했는데, 이를 통틀어 교치(僑置)라고 한다. 문제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교치하는 것이 단순히 몇 차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남북조시대]]까지 수 백년간 누적되어 발생하다보니, 같은 지역에서 파생된 교주·교군 여러 개가 난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주(州)의 규모는 1개 군(郡)과 동일해지고 불과 5개 이내의 현에 그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주·군의 지명도 다른 지역과 서로 겹치지 않는 이름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특히 [[수나라]] 이후로 [[주현제]]가 정립되면서 군은 실제 행정구역이 아니라 단순히 주의 별칭으로 여겨지게 된다. 주현제 하에서 군은 이런 사정이 있어서 그 지명이 2글자가 된 것이다. [[북주]] 때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삼는 왕인 '국왕' 작위가 등장하고, 이후 주현제가 시행되면서 군(郡)의 이름이 2글자로 지정되자, 국왕의 봉호는 자연히 1글자가 흔히 쓰이게 되고 군왕의 봉호는 2글자가 되었다. 때문에 국왕은 대게 '1자왕'으로 보이는 것이고, 군왕은 '2자왕'처럼 보이는 것이다. [[서진]] 이전에는 단순히 군 이름이 1글자인 경우도 있었기에 종종 '1자왕'이 책봉되었지만, 이건 단순히 봉국의 이름이 1글자라 그렇게 불린 것일 뿐 2글자 봉국과 특별히 격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북주 이전에 '1자왕 서열론'을 무조건 대입하면 오류가 발생한다. '[[서초(초한쟁패기)|서초(西楚)]]'를 국호로 사용한 [[항우]]가 스스로 격을 낮춰 '[[고제(전한)|한왕(漢王)]]'이나 '[[전도(제나라)|제왕(齊王)]]'보다 낮은 서열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또한 [[후한]] 초기 [[유강(동해공왕)|유강]]은 원래 황태자였다가 [[광무황후 곽씨|모후]]의 폐후 문제로 인해 그 지위를 포기하게 되어 제후왕으로 책봉된 것으로 아버지인 [[광무제]]도 이를 미안하게 여겨 특별한 대우를 한 경우였는데, 같은 시기에 유강의 친동생인 [[유보(후한)|유보]]가 패왕(沛王)으로 책봉되었다고 하여 그를 친형인 동해왕보다 앞서는 서열이었다 할 수 있을까? 또한 북주 이후로도 작위의 서열은 작호(爵號)와 그 세부 등급에 따른 것이었지, 봉호의 글자 수로 따진 것이 아니었다. 1자왕이 특별한 서열로 규정된 것은 원나라가 유일했다. 원나라는 '''종1품 군왕과는 별개의 작위'''로 그 상위에 정1품 왕(국왕) 작위를 운영했는데, 정1품 왕의 등급을 5개로 나눠서, 등급별로 인장의 재질이나 형태를 달리하여 수여했다. 인장은 금인수뉴(金印獸紐: 순금맹수)–금인이뉴(金印螭紐: 순금이무기)–금인타뉴(金印駝紐: 순금낙타)–금도은인타뉴(金鍍銀印駝紐: 금도금낙타)–금도은인귀뉴(金鍍銀印龜紐: 금도금거북이) 5종류였는데, 이중 금인수뉴를 받는 왕이 최고 등급으로 국호를 1글자로 지정했기에 '1자왕'으로 불렸다. 종1품 군왕은 봉호에 '군왕'임을 명기했고, 인장의 종류도 은인귀뉴(銀印龜紐: 은거북이)로 현격히 달랐다. 사실 고려왕을 포함한 외국의 군주들은 국호가 2글자 이상임에도 금인수뉴를 받았으므로, 1자왕 원칙은 그 봉토가 원나라 직할령에 설정된 경우로 한정된 것이었다. [[심왕|심양왕]]의 경우, 국호가 2글자이므로 원래는 군왕급이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엄연히 정1품 왕(국왕)으로 시작된 작위였으며, 나중에 금인수뉴를 받는 왕으로 격상되었기에 1자왕 '심왕'으로 변경된 사례였다. 참고로 《[[원사]]》제왕표에는 심왕의 서열이 39위고 고려왕의 서열이 41위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왕의 서열이 심왕보다 아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39위까지는 봉토가 원나라 직할령에 위치한 왕들의 서열이고, 40위는 《원사》 찬자들이 봉호를 확인하지 못한 왕위였으며, 고려왕 이후로는 모두 외국의 군주들이다. 즉, 40위부터는 서열 순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왕과 심왕을 겸작한 [[충선왕]]은 고려왕을 우선하여 '고려심왕'으로 불렸다. 일부에서는 《[[고려사]]》에 인용된 [[요나라]]의 국서의 내용을 근거로 일자왕의 특별성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오역이라 할 수 있다. >옛 현도(玄菟)의 땅을 그대에게 모두 주나니 영광은 옛날 일자왕(一字王)보다 높고, 조칙에 의해 부여받은 높은 직위는 삼공(三公)을 겸했다.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23939&cid=62131&categoryId=62161|《고려사》 권6 세가6 정종(靖宗) 5년 4월(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역주, 『국역 고려사』, 2008, 경인문화사.)]] 이 대목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데, >玄菟全封, 榮加於一字, 溫詔峻秩, 兼示於三師. 원문 상으로는 '옛날 일자왕'이라는 표현이 없고 그저 '一字'로만 되어있다. 이는 '三師'를 '삼공'으로 번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들이 특별히 표현을 더하거나 고친 것인데, 요나라의 작위 제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은 채로 이 문장을 해석했기에 '옛날 일자왕'이라는 오역이 나온 것이다. 요나라에선 품계를 초월한 일명 '무품(無品)' 왕을 3등급으로 나눠서 시행했는데, 그 등급에 따라 ○○국왕–○국왕–○왕 순으로 나뉘었고 ○○국왕이 최고 서열이었다. ○○국왕은 '2자국왕(二字國王)'이라 했는데, 봉호의 글자가 2글자라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라, '''2개의 국호가 병기되는''' 왕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다. 예를 들면 소사온(蕭思溫)의 작위는 채초국왕(祭楚國王)으로 '채'와 '초' 두 나라의 국호를 병기한 왕이었고, 북요의 시조인 야율순(耶律淳)의 원래 작위는 진진국왕(秦晉國王)이었는데 '진(秦)'과 '진(晉)' 두 나라의 국호를 병기한 왕이었다. 위의 기록에서 '一字'라고 한 것은 '고려국왕'은 '고려'자체가 하나의 단일 국호이므로 엄연히 '1자국왕(一字國王)'의 부류에 속하지만, 특별히 자국의 '2자국왕'과 비견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