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난득 (문단 편집) == 생애 == 생년 미상으로, 왕난득은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 왕사경(王思敬)을 따라 숱한 전투를 치렀고, 벼슬은 태자빈객(太子賓客)에 이르렀다. 왕난득은 용맹하여, 말을 잘 탔다고 한다. 천보 초년 토번 첸뽀[* 이 당시 첸뽀는 치데축찬.]의 아들 낭지도가 전장에서 날뛰자 왕난득이 화를 내며 창을 겨누고 말을 돌진하자 이에 낭지도는 미처 싸우기도 전에 주살당했다. 환군 후 당 현종은 왕난득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 그를 불러 앞에서 말을 타고 창을 겨누고 낭지도를 찌르는 상태를 연출하라고 명령했다.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금포와 금띠를 하사하였다. 748년 [[가서한]]을 따라 적석군에서 [[토번]]을 공격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고, 753년에는 하서구곡 지역[* 당 중종 시기인 710년 넘겨주었던 곳이다. 이를 넘겨받은 토번은 기병들을 쉽게 양성할 수 있어 당을 쉽게 침공할 수 있었다.]을 수복하고 특진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왕난득은 가서한의 뒤를 따라 동관에 출정했다. 그러나 현종과 [[양국충]]의 실책으로 인해 동관은 함락되고 가서한은 포로로 잡혔으며[* 가서한은 757년 안경서가 업으로 도망칠 때 포로로 잡힌 다른 무장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도망치게 되었다. 이후 당 숙종이 영무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은 재물이 부족하여 왕난득은 견사 삼천 알, 금은기(金銀器) 등을 바쳤다. 지덕 초년에는 위위경(衛尉卿)과 흥평군사(興平軍使)가 되었고, 봉상도지병마사(鳳翔都知兵馬使)가 되었다. 장안을 탈환한 후 반군에 맞서 싸우던 도중 그의 부하 근원요가 전투가 격렬할 때 낙마하여 왕난득은 난처하게 말을 달려 구해 주었고, 적은 그의 눈썹을 쏘아 맞혔는데, 왕난득의 가죽을 늘어뜨려 눈을 막았다. 왕난득은 스스로 화살을 뽑아 말을 달려 다시 싸우고 피를 흘리며 싸웠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숙종은 그를 칭찬했다. [[곽자의]]를 따라 상주(相州)에서 [[안경서]]를 공격하고 낭사군공( 封邪郡公)에 봉해 영무군사(英武軍使)가 되었다. 보응 2년(763년)에 죽으니 노주(魯州)의 대도독(大都督)에 추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