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돈(동진) (문단 편집) == 생애 == [[팔왕의 난]]을 피하려고 했던 낭야왕 [[진원제|사마예]]에게 왕도는 건업으로 피하라고 했고, 이때 왕돈은 사마예, 왕도와 함께 강동으로 내려갔다. 315년에는 도독 강주, [[양주(중국)|양주]], [[형주]], 상주, [[교주]], 광주 6주제군사 및 강주자사[* [[동진]]의 영토 거의 대부분이다.]가 되었으며 한안후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서진]]의 [[진민제|민제]] [[사마업]]이 [[전조(오호십육국시대)|전조]]의 [[유요(전조)|유요]]에 의해 생포되면서 진왕이 된 [[진원제|사마예]]에 의해 대장군의 자리를 수여받아 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322년, 반란을 일으켜 무창에서 거병했는데 대의명분은 중종 원제 사마예의 측근이었던 [[유외(동진)|유외]]와 [[조협]]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사마예가 이들을 중용하며 왕도와 왕돈을 멀리했기 때문으로 석두성을 수비하던 군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당시 조카 왕윤은 왕돈의 반란 모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고, 이에 입에 손가락을 넣고 일부러 구토를 하여 병자를 가장해 목숨을 건졌다. 왕돈은 석두성에서 유외와 조협 등이 이끄는 관군을 무찌르고 원제 사마예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외는 [[후조]]의 고조 명황제 [[석륵]]에게로 달아났고, 조협은 나이가 많아 말을 타지 못하여 수행원들에게 모든 걸 맡겼다가 배신당해 그 [[수급]]이 왕돈에게 전달되었다. 자신의 수족을 모두 잃은 사마예는 왕돈에게 실권을 넘기고 승상에 임명했다. 전권을 손에 넣은 왕돈이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육하고 옛 무덤을 [[도굴]]하는 등 전횡을 부리니, 사마예는 이내 분사하고 말았다. [[명제(동진)|숙조 명제 사마소]]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원래 왕돈은 그를 싫어하는 사마소를 꺼려 모함을 했으나, 실패했으며 예상대로 사마소는 황제가 되자 마자 왕돈이 저지른 악행을 구실로 그를 처벌하려고 했다. 323년, 명제 사마소는 왕돈을 역적으로 규정하며 정벌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에 왕돈은 제위 찬탈을 노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거병 직전에 병으로 쓰러졌다. 이때 왕돈은 점쟁이 곽박(郭璞)[* 하지만 다른 기록에선 점쟁이가 아니라 학자로서 《[[산해경]]》을 정리한 인물로 나오며, 왕돈에게 죽은 것도 반란을 막으려다가 못 막자 "이 망할 반역자야, 네놈 목이 잘려나가고 사지가 찢겨질 짓을 스스로 하는구나!"라고 탓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왕돈은 시체가 능지처참되었다.]에게 길흉을 점치게 했다. >곽박: "이번 거사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왕돈: "나의 수명은 어떠한가?" >곽박: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장군께서는 이미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으시면 장수하실 것이나 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죽게 될 겁니다." >왕돈: "너의 수명은 어떠한가?" >곽박: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즉, 오늘 해를 넘기지 못합니다." 이에 화가 난 왕돈은 곽박을 죽였다. 왕돈은 병이 든 자신 대신에 형 왕함을 대장으로 세워 출병시켰다. 그러나 왕함은 324년 7월 수도 건강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월성에서 명제의 관군에게 대패했다. 패전 소식을 듣은 왕돈은 >"우리 형은 늙어빠진 하녀처럼 쓸모없구나!" 라고 말하며 스스로 선두에 나서려고 했으나, 병이 나서 힘을 다하고 쓰러져 그대로 죽었다. 이후 왕함을 포함한 잔당들은 왕도가 이끄는 진압군에 의해 모두 소탕되었고 왕돈의 무덤은 파헤쳐져서 시신이 [[부관참시]]된 후, 목이 명제에게 바쳐졌다. 그외 왕돈의 가족들도 전부 처형되었다. 그러나 왕도 일족은 무사했고 왕도는 이 공으로 승상으로 복귀해 도간, 유량, 치감과 함께 실력자로 부상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동진 내 신하들은 역적은 본디 9족을 멸하는 법이니 왕도는 왕돈의 사촌이니만큼 그와 그의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우겼지만 명제는 "왕도가 왕돈과 촌수가 가까운건 맞소. 하지만 그와 그의 일가는 왕돈 일가와 관계를 끊고 지내며 부황을 도운 충신이니만큼 더 이상은 따지려 들지 마시오!"라고 단호하게 일축하였다. 참고로 왕돈이 죽인 조협의 아들 [[조이(동진)|조이]]는 왕돈 토벌전에 참가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는데 조정에서는 감탄하며 벼슬을 내렸고 이에 조이는 입신양명하여 서주자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이의 아들 [[조규]], 조창(刁暢) 형제는 동진 말기 환현의 측근으로 지내다가 [[유유(송무제)|유유]]에게 피살되었다.(404) 조창의 아들 조옹(刁雍)은 [[북위]]로 망명하여 청주자사를 지냈고, 484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자손들은 번창했다. 한편 달아난 유외는 승상좌장사에 임명되어 [[석호(후조)|석호]]와 함께 장안에서 반란 일으킨 하동왕 석생을 토벌하러 가다가 동관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유외의 아들 유수(劉綏)는 젊은 시절에 수재로 올랐고 부마도위까지 올랐으나, 아버지와 함께 함께 동관에서 전사했다. 유수의 아들 [[유파(동진)|유파]]는 [[석호(후조)|석호]] 사후 후계 다툼으로 난장판이 된 후조를 빠져나와 동진으로 도망쳤고, 왕흡(王洽)[* 왕도의 3남으로 서예가로 유명하다.]의 참군이 되어 관군장군, 남군상을 거쳐 산기상시가 되었다. 유파의 아들이자 유외의 증손자였던 유염(劉淡)은 여강태수가 되어 권신인 [[환온]]과 교류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