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랑(삼국지) (문단 편집) === 초기 생애 === 경전에 통달하여 낭중과 치구의 장으로 임명받았다.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취했으며, 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공부로 초빙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서주]][[자사(관직)|자사]] [[도겸(삼국지)|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으나 [[시안|장안]]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도겸의 치중으로 있었다. 이때 [[조욱]]과 함께 천자에게 왕명을 받들겠다는 표를 올리도록 권했고, 조욱을 통해 표를 올렸다. 도겸은 안동장군, 조욱은 [[광릉]][[태수]], 왕랑은 회계태수로 임명받았고,[* 이때 왕랑의 나이는 고작 20대였다.] 이때 [[사촌]]형의 모반으로 처형받을 위기에 처한 [[허정(삼국지)|허정]]도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회계를 다스리던 도중 [[손책]]이 [[장강]]을 넘어 침입했다. 부친상을 당한 공조 [[우번]]이 상복을 벗어가면서까지 손책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자신은 한 [[왕실]]의 관리이니 지켜야한다며 고릉을 방비하며 손책군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손책이 [[손정#s-1]]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자 [[주흔]]과 함께 그를 막으러 갔다 패배하였다. 이때 '''[[표류]]'''하여 동야까지 밀려갔다. 우번이 동부 후관의 장 [[상승]]을 설득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나,[* 이때 우번은 노모를 모셔야한다며 회계로 돌려보낸다.] 그곳마저도 손책이 군대를 보내니 상승과 왕랑의 군대는 대패한다. 손책은 왕랑의 유학적 명성을 생각하여 그저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유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했고, 아침에 저녁먹을 것이 없어 걱정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며 위로하고 모든 행동을 도의에 기초하여 하니 왕랑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이에 [[조조]]는 그를 초빙한다. 하지만 곡아에서 출발한 왕랑은 '''[[캐스트 어웨이|또 표류]]'''하여 몇 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도착해 간의대부, 참사공순사로 임명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