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릉(삼국지) (문단 편집) === 마지막 행보와 의문점 === 왕릉의 난은 수춘삼반 중에 가장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 사건이지만 음모의 스케일은 가장 컸다. 사마의 타도는 물론 조방의 폐위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덕분에 오히려 모반의 순수성(?) 문제는 애매해진다. 출신 문제로 잡음이 있는 조방이지만 조예가 인정한 정통 후계자임은 분명한데, 그런 조방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이 과연 조위에 대한 충성인가? 더군다나 그 조방도 고작 2년 뒤 사마씨를 상대로 저항하다가 폐위되는 운명을 맞는데, 이런 조방이 사마의의 꼭두각시라고 무조건 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게다가 사마씨 전횡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해도 왕릉의 아들인 왕광 조차도 '지금 사마의가 하는 일은 전부 조상의 실책을 바로 잡는 것뿐이니 트집 잡을 구석이 없다'고 말했고,실제로 이후 '사마 형제에 대한 항거'를 전면에 내세운 관구검/문흠 역시 사마사에 대해 탄핵할 때 사마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고, 사마사가 위나라에 충성한 제 아비의 뜻을 거스르고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조위에 대한 충성 여부와는 별개로 사마의와 그 자식들에 대한 적의가 수면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고평릉 사변]](조상 주살) 때문인데, 확실히 이후 사마씨와 다투다 죽은 사람 대부분은 이때 죽은 자들과 연이 있지만 정작 왕릉은 그 조상과 딱히 이렇다 할 친분도 없었고 오히려 이런저런 기록들을 봤을 때 그는 사마의 파벌이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릉이 난을 일으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모의에 가담한 [[영호우]]는 확실히 조상과 연이 있다. 사마의가 왕릉과 아들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을 높이 평가했던 [[장제(조위 태위)|장제]]가 자신 때문에 왕릉 일가가 해를 입게 되었다고 탄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사마의 쪽에서 왕릉을 견제한 것이고 왕릉은 선수를 쳤을 뿐인 걸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모반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분위기도 뭔가 좀 미묘하다. 왕릉은 잘못을 인정하는 건지 변명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로 횡설수설하며 정에 호소하려 하는 반면, 사마의는 그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어쨌거나 위략에 실려있는 사마의에게 보내는 왕릉의 편지를 보면, >소인, 어느새 신군(神軍)이 비밀리에 출병해 백척 앞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으니, 잠시 접견이 지체될 뿐 결국 머리와 몸이 떨어질 터이나 이를 한스러이 여기진 않겠습니다. 몇 차례 사자를 보내 서신을 전했으나 그 회답이 오지 않았는데, 발꿈치를 들고 서쪽만 바라본 이 마음 비할 데가 없습니다. > >저번에 사자에게 서신을 쥐어 보낸 후,배를 타고 멀리까지 나와 밤에는 돌을 쌓아 숙영하고 낮에는 포구에 나와 하염없이 사면 받기만을 바라길 스무날 하고도 사흘, 돌아온 서신이 전한 명령을 듣고나자 너무나 놀라고 당혹스러워 오장이 녹아 내리니 대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 겨를 조차 없습니다. > >이 못난 종은 황송하게도 조정의 은혜를 입었으나 오랜 노력에도 해낸 것은 없고,군마를 돌보고 동하 일대를 감독하며 크고 작은 과실과 실패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마음은 의를 저버렸으니 그 죄가 삼백가지요,이제 처자식과 함께 이렇게 스스로를 결박했으니 무슨 궁색한 바램이 있겠습니까. > >비록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큰 성은을 바랄 마음은 추호도 없사오나 무엄하게도 살아남아 해와 달을 다시 볼 수 있기만을 조심스레 희망할 뿐입니다. > >죽은 조카 영호우가 사람들을 홀리는 말을 퍼트릴 때 이 종놈은 즉시 엄히 꾸짖었으나 부득이 그 말이 퍼짐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 >이제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되고 천지신명이 꿰뚫어 보셨으니 이 못난 놈은 더이상 감출 수 없어 털끝 하나 빠짐없이 드러내는 바,이는 제 죄가 죽어 마땅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 >나를 낳으신 분은 부모이나 나를 살리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生我者父母,活我者子也). 이 문구는 [[관이오|관중]]의 명언인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이나,나를 알아준 자는 [[포숙아]])를 살짝 바꾼 내용이다. 사실 사마의와 왕릉의 우정이 왕릉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고 실제로 수많은 정황증거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일단 왕릉은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과 굉장히 교우가 깊었고 사마 형제와 비슷한 시기 승상부 소속 주부로 활동했는데, 사마랑/사마의/왕릉은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러 갔을때 [[가규]]가 목숨 걸고 간언하자 그와 뜻을 같이한 세 명의 동료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이자 동료라는 얘기. 또한 왕릉은 역시 승상 주부시절 부터의 오랜 동지이자 고평릉 사변의 일등 공신인 장제의 후임 태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 비극적으로 틀어지고 만 장제의 후임으로 사마의가 왕릉을 밀어줬다는 것은 그가 왕릉을 장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신임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왕릉에게까지 배신당하고 난 뒤 사마의가 [[태위]]에 앉힌 인물은 자신의 동생인 [[사마부]] 임을 감안하면 왕릉을 마지막으로 사마의는 더 이상 친구조차도 믿기를 거부할 정도로 그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왕릉의 혐의가 드러난 뒤에도, 사마의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왕릉 쪽에서 먼저 자결한 뒤에야 피의 응징[*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왕릉의 반란이 미수에 그치자 수춘에서 대량으로 사람을 죽였다.]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 관포지교 드립 이면에 숨은 의도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중과 포숙아가 속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제 희공의 세 아들 중 관중은 둘째 규, 포숙아는 셋째 소백의 스승이었다. 두 사람 사이 계승 경쟁이 벌어졌을 때,관중은 규를 위해 소백을 제거하고자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빗맞았고 결국 계승자는 소백이 되었으며,이후 소백이 규 세력을 숙청할 때 당연히 규는 주살 당했지만 소백을 죽이려한 당사자 관중은 포숙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즉 여기서 왕릉이 자신을 관중에, 사마의를 포숙아에 대입한 것은 '내가 비록 조방을 폐하고 조표를 옹립하려 했지만 딱히 널 어쩌려 한 건 아니니, 조표는 죽이더라도 나는 살려주면 안 되겠니?' 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 당연히 조표 옹립 기도의 실제 중심 인물이 왕릉이 책임 전가했듯 그의 조카인 영호우라 할지라도 그는 이미 죽었고, 그 이후 아들인 [[왕광#s-2]]의 반대까지 꺾어가며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이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주체는 결국 왕릉이었다. 그런데 멀쩡히 지내던 조표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 왕릉 본인이, 그 조표를 희생양으로 써서 자기만 살아남고자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왕릉이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사마의가 자신을 살려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엔 가규의 묘 앞에서 자신이 위나라의 충신이라 외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죄가 없었던 건가 싶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