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릉(전한) (문단 편집) == 평가 == 유방이 죽을 때 "왕릉은 우직하다"는 평가를 남겼을 정도로 강직하고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성품이었다. 임협 출신이라는 점이 이런데서 잘 드러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삼걸]]의 일화 때 유방을 칭송하면서도 굳이 "폐하께서는 오만무례하십니다"라는 안해도 상관없을 말을 덧붙인데서 잘 엿볼 수 있다. 유방 사후 [[여후]]가 집권했을 무렵 상국 [[조참]]이 죽자 우승상이 되어 좌승상 [[진평]], [[태위]] [[주발]]과 함께 국정을 이끌었다. 왕릉이 우승상이 된 지 2년 뒤에 혜제가 죽자 여후는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어 여씨 일족을 제후국 왕으로 삼고자 하여 우승상 왕릉을 불러 이게 되는 일이냐고 물었더니 왕릉은 강직한 성품답게 "안 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진평과 주발에게 물으니 이들은 된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진 왕릉이 진평과 주발에게 "예전에 선제와 함께 백마의 피를 마시며 맹세했을때 공들은 그 자리에 없었소? 이제 선제께서 붕어하시고 태후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데 공들은 태후에게 아부하며 맹세를 배반하니, 무슨 낯으로 지하에 계신 선제를 뵈려 하시오?"라고 따지자 이에 대한 진평의 답변이 유명하다. >지금 조정에서 질책하고 간언하는 것은 우리가 우승상만 못하오. 하지만 사직을 보호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것은 우승상께서 우리만 못하실 거요. 이 답변을 들은 왕릉은 '''더 할 말을 잊었다'''(사기에서 정말 이렇게 써놨다). 이 직후 왕릉은 여후에 의해 태부가 되었지만, 태부 자리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이는 승진을 가장한 좌천과 다름없는 조치였다. 이에 화가 난 왕릉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7년간 칩거해 있다가 기원전 180년에 사망했다. 웃기게도 그렇게 싫어한 여씨들과 같은 해에 사이좋게 죽었다. 그의 작위는 아들 왕기가 이었고 현손 때까지 이어지다가 주금(酎金) 문제로 봉국을 박탈당해서 후 작위는 끊어졌다. 어쨌든 그 치열했던 초한전쟁 시기에 항우에 맞서 선두에 섰으면서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유방과 처음에는 다소 껄끄러운 면이 있었음에도 한나라의 우승상까지 올라갔으며, 험악한 여태후 시절에도 관직에서는 물러났으나 목숨을 보존해서 유방과 여후보다 더 오래 살긴 했았으니[* 소설에서는 젊은 장수로도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유방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15년을 더 살았다. 고대 사회라는걸 감안하면 꽤 장수한 편이다. 70대까지 살았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전국칠웅]]이 아직 건재하던 시절에 태어나 [[진(영성)|진나라의 통일, 통일 진 제국 치세, 진나라의 멸망]], [[초한전쟁|초한쟁패기]], [[고제(전한)|한 고제]]의 치세를 건너 [[여후]]의 치세까지 다 목격한 격변기의 산 증인이였던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