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릉 (문단 편집) ==== [[진(통일왕조)|진(秦)나라]] ====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일대의 산악지대에 있던 진나라는 동쪽으로 천도하여 지금의 섬서성 바오지시 일대의 옹성에 천도하게 된다. 옹성은 진나라 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수도로 기능하는데, 심지어 시안 인근의 여러번 천도를 하더라도 종묘와 사직은 옹성에 두었다. 이 옹성 남쪽에는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묘역은 남북 약3 km, 동서 6 km 약 18 k㎡에 걸쳐서 펼쳐졌다.[* 상나라 은허 유적의 약 200배 규모이다] 모두 진나라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외표에 봉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탐침법으로 대략적인 묘들의 분포는 밝혔다. 대형묘를 기점으로 중소형묘들이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는게 마치 경주 대릉원의 무덤들 같다. 그 중에 초대형 무덤인 진공1호묘가 조사되었는데, 묘곽은 中자형 묘곽이며, 길이는 60 m 너비 40 m, 깊이는 25 m에 달한다. 여기에 길이 80 m 너비 40 m 남짓한 병마용갱이 따로 또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으로 보아 경공(景公 기원전 577~ 기원전 537)의 무덤으로 비정한다. 진나라는 이후 여러 차례 천도했는데, 지금의 시안 서북쪽의 함양에 수도를 옮기고 나서는 그 주변으로 왕릉들이 형성된다. 무덤은 지금의 함양 북방에 2기, 시안 시가지 남방에 1기, 시안 동쪽 시가지에 1기, 진시황릉 인근에 최소 5기 정도가 발견된다. 이 시기의 진나라 무덤은 전기는 묘곽 형태가 中자형, 후기에는 亞자형 대묘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물론, 왕자나 귀족 무덤으로 추정하는 것들은 中자형, 甲자형 무덤이 눈에 띈다. 천자의 예를 적용한 것으로 더 이상 주나라 때 제후 질서가 무명무실해졌음을 의미한다. 묘곽의 규모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대묘를 기준으로 할 때 진공대묘보다 한층 더 커졌다. 그리고 봉분이 유실된 것도 있지만, 높은 봉분이 관찰된다. 그래서 함양시 북방에 있는 것들은 한나라 황릉들 사이에 끼여있어서, 배장릉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탐측조사와 시굴조사 결과 전국시대 기와 및 도기편들이 출토되면서 진나라 왕릉으로 확정. 주목될 것은 진시황릉이 건설되기 직전의 왕릉들이다. 이 최후기 왕릉은 지금의 시안시 동쪽 근교에 1기, 그리고 진시황릉이 위치한 여산의 남록 일대에 5기 분포하고 있다. 전자는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의 무덤이라 하여, 장양왕릉, 후자는 동쪽에 있는 진나라 왕릉이라고 하여, 진동릉이라고 부른다. 장양왕릉 같은 경우는 탐측조사를 통해 주묘곽의 형태와 규모가 확인되긴 했지만, 그 주변은 빠른 도시화로 인해 원 지형을 완전히 상실하여 본래의 능원 형태가 복원되기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대체로 진시황의 아버지 장양왕릉, 혹은 그 할아버지인 효문왕릉으로 추정한다. 진동릉은 수십년전부터 남은 봉분과, 탐측조사, 간간히 지표에 노출되는 유물로 인해서 대략적인 무덤 위치, 개수와 규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1년 폭약을 동원한 도굴 사건으로 인해 이 일대를 전면적으로 조사중이다. 현재까지 제한적인 언론보도 외에는 학자들끼리도 정보 공유를 잘 하지 않을 정도로 관련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민감해한다. 발해 유적을 숨기는 것처럼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아니고, 한 번 도굴됐기 때문에 민감히 반응하는 듯하다. 상술했다시피 이 일대의 무덤은 진시황 직계 조상 일족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진사황릉 형태에 가까운 배장갱들의 배치, 배장묘, 병마갱, 능원, 능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