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모중 (문단 편집) == 행적 == 본래는 고구려 장수였으나 멸망하고 노비가 돼 버린 왕구루(王求婁)의 아들이었다. 훗날 당 현종이 되는 임치왕 이융기의 수행노비가 되어 [[710년]] 3품인 대장군 직에 올랐다. [[713년]] 당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 [[측천무후]]의 딸로 당 현종에게는 [[고모]]가 된다. 측천무후를 가장 닮은 딸이었다고 측천무후 본인이 인증했을 정도.]가 당 현종의 제거를 노리자[* 이러한 태평공주의 모반이 실은 현종측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역으로 현종은 왕모중과 군사 300명을 보내 태평공주를 처단했다([[선천정변]]). 이 공으로 보국대장군, 좌우위대장군으로 승진했는데, 검교내위한구 겸 지감목사 직위를 받고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병마(兵馬)를 다스리는 것이 뛰어나 새로운 관리방법을 도입해 24만마리의 병마를 43만마리로, 소 3만 5000두를 5만 두, 양 12,000마리를 28만 6000마리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모중의 권세가 점차 커져서 환관 [[고역사]]를 비롯한 환관들의 견제를 받았다. [[730년]] 황제에게 병부상서의 직위를 요청했지만 왕모중이 역모를 꾸민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이를 거절했고, 이듬해인 [[731년]] 양주자사로 추방당하고 현 [[호남성]] 영주에서 교살당했다. 아들 넷이 있었지만 왕모중의 사망과 함께 먼 지방의 참군 직으로 쫓겨났다. 딸은 용무군 대장 갈복순[* 이 사람은 왕모중과 연좌되어 마찬가지로 좌천되었다가 732년 [[발해]]의 [[장문휴]]가 당의 등주(산동 반도 끝)를 공격했을 때 복직돼서 대발해 방어에 투입됐다.]의 아들과 결혼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고구려의 유민]][[분류:731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