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비 (문단 편집) ==== [[원 간섭기]]~고려 말 ==== 후반기부터는 태후[* 대비를 추증]>[[대비]][* [[원 간섭기]] 이후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대비는 왕태후의 격하된 버전이다. 국대비는 공양왕 이후 왕대비와 구분해 공양왕의 생모 [[국대비 왕씨|복녕궁주]]를 국대비라고 불렀다.] 왕비=몽골 공주>공주>비(妃), 원주>옹주>택주 혹은 궁인 순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왕실 관제가 상당수 격하되고 [[내명부]]의 수장과 그 구성원 일부가 [[원나라]] [[공주]]가 되면서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법제상 내명부의 수장이 제후국의 왕후로서 비(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궁들의 최고 품계는 제후국 군주의 첩인 빈(嬪)이 아니라 여전히 황제국의 첩인 비(妃)인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실 [[원나라]]가 고려의 관제와 왕실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이 격하는 사실 눈에 띄는 주요부서들에게 주로 행해진 것이며 고려의 관제 모두를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이 아니었다. 3성이 죄다 격하되었어도 그 안에 있는 관제들이 격하되지 않아 고려 행정의 위계성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긴 것이다. 후궁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선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비(正妃)가 되었다. 원나라 출신이면 고려인 부인들보다 서열이 앞섰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비로 대우받았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정식 부인으로 둘 수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상으로는 비(妃)가 붙은 이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간주했다. 봉호의 종류는 이때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몽골 공주가 황제로부터 고려왕비 책봉을 받았으나 이후 고려에서 왕후나 왕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띄게 된다. 또한 호칭적인 면에서 궁주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 공주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주칭호는 원나라의 공주, 원나라 출신 후궁들과 그들의 딸들이 쓰게 되어, 칭호가 격하된 것이다.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하는 고려 왕실의 전통에 비추어 어머니를 따라 왕녀는 궁주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궁주=공주가 격하되어 고려인 출신 후비와 그들의 딸이 쓸 수 없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정화궁주]], 정화궁주의 딸인 정녕원비(靖寧院妃), [[충혜왕]]의 딸 장녕공주이다. 정화궁주는 [[제국대장공주]]의 눈밖에 나서 부고에 가둬진 뒤에 정신부주라고 칭호가 바뀌었고, 정녕원비는 아버지 [[충렬왕]]이 즉위할 당시 궁주로 책봉되었지만 시호는 한단계 낮은 원비가 되었다. 반면 장녕공주는 [[덕녕공주]]의 딸이었다. 궁주의 칭호는 원간섭기를 벗어난 [[공양왕]]과 조선 초기 때 복구된다.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충선왕]] 때 궁주를 대체하며 후궁과 왕녀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충선왕 때부터 옹주 칭호는 궁주보다 낮은 원비(원주)보다 낮게 쓰여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다. 충선왕에게 의붓딸이 되는 순비 허씨의 딸들과 충선왕의 친딸 수춘옹주(壽春翁主)는 모두 옹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궁주가 족내혼을 하던 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충선왕 때 이르러 왕녀와 종실 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므로, 옹주가 궁주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춘옹주의 출신에 주목해야 한다. 수춘옹주는 [[고려사]] 열전의 공주에서 누락되어있다. 천인 궁인이나 왕자를 낳지 못해서 봉작을 못받은 양인 궁인 소생은 아예 고려사의 왕자나 공주 항목에서 기록이 누락되는 것이 빈번하다. 그리고 수춘옹주의 어머니는 이복형제 [[덕흥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록에 없다. 천인 출신 궁인이 낳은 왕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소군]]이라 불리며 출가한 고려 왕실 전통을 따라서 덕흥군은 출가했다. 수춘옹주의 어머니도 덕흥군의 어머니와 같은 궁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궁주를 대신해 옹주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희박해보인다.[* 수춘옹주와 [[덕흥군]]의 차이점은 덕흥군의 어머니의 출신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춘옹주의 어머니가 궁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인인지 천민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충선왕의 후궁 중 원비의 칭호를 받은 이가 보여, 수춘옹주가 원주(원비) 칭호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의 의붓딸들 역시 친부가 종실이었으나 친딸은 아니었기에 원주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천민출신 후궁 등에게서 보이며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에서 남발되었다. 한편 [[충혜왕]]이나 [[우왕(고려)|우왕]] 때는 출신이 천민출신인 기생이나 사노비, 관비 등이 품계를 받은 사례가 있다. [[충혜왕]]의 후궁 은천옹주와 [[우왕(고려)|우왕]]의 여러 후궁이다. 충혜왕 때는 내명부의 관제가 무너져 궁인 중 천민 출신이 택주와 옹주를 받았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또한 우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노비나 천민, 기생이어서 ㅇ비(妃)와 옹주로 책봉되자 백성들이 놀랐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소군|그러나 천민출신 은천옹주의 아들은 왕위계승권은커녕 신분 때문에 얄짤없이 출가했다.]] 예외로 [[우왕(고려)|우왕]]이 있지만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당시 공민왕의 형제 중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그런데도 불안했는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공원왕후 홍씨]]가 손자 우왕 대신 혈통이 온전한 종친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 이만큼 고려에서 신분와 혈통의 벽은 높았다. 혹은 원주가 후궁과 서녀의 칭호로 정착되고 옹주가 이를 대신했다는 시각도 있다.[[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806|출처]]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갈수록 옹주 칭호가 서왕녀와 후궁에 그치지 않고 남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 [[원 간섭기]]와 후반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태후(왕후) : 왕의 할머니 혹은 어머니. 혹은 대비를 추증. * 대비 : 왕의 어머니 혹은 전 왕비. [[공민왕]] 때 잠시 태후로 바뀌었다. * 공주 : [[원나라]] 황족/귀족 출신 후비나 그들의 딸. * ㅇ비(妃), 원주, 원비(院妃) : 고려인 출신 후궁과 그들의 딸. 혹은 공주가 되지 못한 몽골 출신 후궁. 예외적으로 우왕 때 노비출신이 되기도 하였다. * 옹주 : 천민 출신 후궁과 궁인의 딸,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왕족 여인, 왕자의 처, 후궁의 어머니 등) * 택주 : 천민 출신 후궁과 공신의 처, 후궁의 어머니 봉작 등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는 적서 차별[* 고려는 적서 차별의 개념이 달랐다. 먼저 태어나거나 먼저 들어온 부인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장남은 태자가 됐다.]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다. 호칭상이나 명예상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왕족이나 귀족 출신 후궁과 그 자식들 한정이고 천출 후궁과 그 자식들은 조선보다 더 심하게 차별했다.] [[혜종(고려)|혜종]] 때 왕실을 뒤흔들었던 왕규의 난만 봐도 이 [[내명부]] 서열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선이었다면 현재의 국왕이 선왕의 장남이고, 위로 선왕의 왕자들이 바글바글한데 선왕의 16번째 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나올 수는 없었다.[* 단 광주원군을 보위로 올리려 했다는 부분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왕규 측이 패배자이기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받는다. 정황상 왕식렴의 난이라고 봐야한다는 말도 있고, 왕식렴에게 왕규, 박술희 등의 혜종파가 학살당하고 왕식렴의 거사의 명분을 위해서 왕규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로, 서자인데다 서열이 높지 않은 왕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고려 당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종(고려)|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개나 소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새로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간혹가다 과부도 후궁이나 왕후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와 충렬왕,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충선왕의 후궁인 순비 허씨(順妃 許氏)가 있다. 심지어 순비는 전 남편과의 자녀가 8명이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