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세현 (문단 편집) === 금에서의 첫 관직 생활 === 1195년 출생으로, 본래 몽고 왕고부 사람이다. 금 선종 정우 2년(1214)에 군공으로 천 명의 부장을 선발하였다. 이후 1225년, 공주(지금의 감숙 농서) 주장 전서조가 반란을 일으켰고, 왕세현이 공주 수문장으로 있던 시절, 성문을 열어 섬서 행성 평란군을 맞이해 곧 반란이 평정됐다. 전관은 지평량부사(知平亮府事), 영농주(領龍州) 방어사를 차례로 임명했다.정대 6년(1229), 공창부(지금의 감숙 농서)의 치중을 개칭하고, 동지를 바꾸어 참의수부 기무(機務)를 겸하여 완안중덕(完安仲德)을 보좌하여 농우, 제주의 흩어진 패잔병 수만 명을 모집하고, 공창부를 석문산(石門山)으로 바꾸어 험한 벽에 의지하여 몽골을 방어하였다. 1232년 변경이 위급하자 [[완안중덕]]은 부원(部援)을 이끌고 왕세현은 편의총수를 맡아 군대에 남아 공창(孔昌)을 진두지휘하였다.천흥(天興) 3년(1234) 초 금이 멸망하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 천수) 원수인 점갈완전이 행성(行省)이라 칭하며 밀랍환조서를 위조하여 공창(孔昌)을 겸제하려 하자 왕세현은 이에 불복하여 점갈완전을 공격하고 그 군으로 진(秦)·공(公)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지만, 금나라 정삭을 받들었다.또 남송 사천제치사 조언납에게 수차례 사절을 보내 내투를 요청했다. 1235년, 몽골 제국의 황태자 활단(活端)이 진, 공을 거쳐 공창(孔昌)에 이르자 왕고 부족 사람들을 보냈고, 10월 4일 성민들을 통솔하여 몽골에 투항하였는데, 몽골의 의복을 하사받고 옛 관직을 유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