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소군 (문단 편집) == 혼인 과정 == 한서 원제기에서는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경녕은 동흉노는 한나라에 순종해오고 서흉노는 멸망시켰음을 기념하는 연호이다.]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위와 같이 혼인을 요청하자,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嬙)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평소 [[원제(전한)|한원제]]는 [[후궁]]이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그걸 보고 누구와 동침할지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하지만 왕장만이 뇌물을 주지 않아서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없었다.[* 당연히 모연수가 뭔가 훼방을 놓은 것이지만 정확한 언급은 없다. 추녀로 그렸다는 설도 있고, 눈물점을 찍어서 과부상으로 그렸다는 설도 있다.] 당시 [[흉노]]와 [[전한]]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흉노의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는 한족 [[궁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는데, 이에 [[전한]]은 적당히 [[후궁]]을 보내기로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부마국이 되려고 [[공주]]를 보내 달라고 했으나, 공주가 너무 어린 나머지 춥고 험한 북쪽으로 공주를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던 원제가 호한야 선우한테 공주 대신 궁녀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양해를 구한 이야기도 있다.] 원제는 그래서 초상화만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아깝지 않을 왕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기 전날에 왕장을 만나보았더니 웬걸, 왕장이 천하절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왕장을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분노한 원제에 의해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