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소군 (문단 편집) == 유복한 노후 == 위에 나온 저런 사연 따위를 알 리 없는 [[호한야]] 선우는 '이런 [[미녀]]를 주다니 [[한나라]]가 우리 [[흉노]]와 잘 지내고 싶다는 거구나'하고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으며[* 당시 호한야 선우의 동흉노는 이미 한나라에 칭신한 상태였으며 서흉노가 한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중히 그녀를 대접했다. 왕장은 호한야 선우의 [[연지#s-2]]가 되어 아들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의 사후 당시 흉노족의 수계혼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누약제 선우[* 전우 연지와 호한야 사이에 난 아들로 이름은 조도막고이다.]의 처가 되어 딸을 낳았다.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기에 이를 왕장의 비극이라고 하기도 하나 유목민들의 사회에서는 자신을 낳은 생모나 적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아들이 들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습속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그 재산은 아내가 상속받게 되는데, 이 아내가 다른 사람과 재혼할 경우 가문의 재산이 재혼한 사람에게 전부 넘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 경우를 막기 위해서 자식이 아버지의 처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재산을 지켰다는 설이 있다.]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장이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의붓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자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전하며, 민간 전승에서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장은 사실 흉노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한족 문화를 흉노에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후한서]] 흉노 열전에 금조를 참고해서 쓴 범엽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은 모두 자기 아내로 들이지만, 친어머니와 적모는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왕장과는 상관이 좀 떨어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흉노와 한 왕조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흉노의 침략 또한 사그라들었다. 왕장을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인식할지언정 나쁘게 보지 않는 것엔 이런 점도 작용한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