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식렴 (문단 편집) == 생애 ==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궁예]]의 [[태봉]] 시절 때부터 관직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왕식렴 열전에서 그가 군부서사(軍部書史)를 지냈다고 하는데, 평양으로 파견된 시기가 고려 건국 직후인 점을 감안하면 군부서사는 태봉 때 지낸 관직명으로 보인다. [[918년]] 고려가 건국된 후, 변방의 안위가 걱정된 왕건은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왕식렴과 광평시랑 열평에게 평양을 수비하게 했다. 이를 통해 사촌 형인 왕건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서경을 맡게 된 이후 청천강 쪽으로 영토를 넓혀 안수진, 흥덕진을 쌓는 등 고려의 북진에 공을 세웠다. 이후 태조 왕건이 붕어하고 그 뒤로 [[혜종(고려)|혜종]]이 등극한 후에는 왕실의 어른 대접을 받게 되었는데 혜종 붕어 시점과 맞물려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건의 두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가 되는 요, 소 두 왕자와 함께 난을 진압하여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처형한 후 요를 임금 자리에 올리니 그가 바로 [[정종(고려 3대)|정종]]이 되었다. 다만 이 왕규의 난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이미 권력에서 배제된 채 유배를 떠난 [[박술희]]를 왕규가 굳이 암살할 이유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 왕식렴이 서경에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걸로 볼 때 왕규를 제거하고 왕자 요를 임금으로 세우기 위해 박술희와 왕규를 죽이고는 기록을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있다. 우리가 왕규의 난이라 알고 있는 그 사건이 사실은 왕식렴의 난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바로 그것. [[조선시대]]에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에 정종이 왕규의 난 진압 후 왕식렴에게 광국익찬공신 공신호와 대승 품계를 내리는 [[조서(명령)|조서(詔書)]]가 남아있다. 조서에서는 정종이 왕식렴을 매우 아꼈다는 것이 드러난다. 어쨌든 정종의 등극에 기여한 왕식렴의 입김 때문인지 정종은 서경 천도를 천명하며 이를 실행에 옮겼고 이 정종의 치세 때 왕식렴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리한 서경 천도 공사에 일반 백성은 물론 개경 호족들까지 거세게 반발하는 데다 왕자 소마저도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등 정종의 치세가 혼란해진 가운데 949년 사망했다. 결국 두 달 뒤에는 그가 옹립했던 정종도 붕어했고 끝내 왕소가 즉위해 [[광종(고려)|광종]]이 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광종이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인 흥화군과 경춘원군을 밀어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왕식렴과의 대립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천도로 개경 호족들이 반발하는 상황에서 대표격으로 반대했던 사람이 왕소였기 때문. 당연히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개경을 기반으로 잡은 호족이 왕소를 지지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왕소가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