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안석 (문단 편집) == 비판 == 후대에 대표적인 개혁자로 평가받지만 소위 '개혁 정치인'들이 다 그렇듯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개혁 부분에 집중하여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엔 이쪽이 다수파지만, 한동안은 그 폐단에 주목하여 나쁘게 보곤 했었다. 특히 [[성리학]]을 세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남송]]의 [[주자(철학자)|주희]]가 사마광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저평가되어 온 편. 주희는 왕안석 또한 나름대로 유능한 명신으로 평가했지만 신법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북송의 멸망 원인으로 이 신법의 부작용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왕안석의 평가는 나빴다.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신법 자체가 비현실적 내지는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에 소동파는 희녕변법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일단 정부의 전곡 출납 장부의 곡식 가격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고, 품질이 떨어지면 팔 수 없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조정에서 사들이고 되파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똑같거나 구법 이상이고 차라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희녕변법 후 신종은 32곳이나 되는 궁내 창고에 비단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를 추가로 지었을 정도였지만,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이 민간의 이익을 빼앗는것이라 지적하고[* 이게 후일의 조선에서 공납을 대신해 [[대동법]]을 추진하던 이들이 왕안석의 신법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 걸 조심한 이유가 될 것이다.] [[상홍양]]에게 속은 [[한무제]] 말년에 이르러 도적들이 봉기하고 난이 일어났다며 만약 무제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거나 [[소제(전한)|소제]]가 법을 고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망했을 거라고 하기까지 했다.[*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하는 상소에서 한무제가 재력이 고갈되자 상홍양의 설을 받아들여 싼것을 사들이고 비싸게 파는걸 균수라고 했는데 상인들이 쓸모없게 되었고 도적이 일어나 개판이 났다. 한소제가 즉위하고 [[곽광]]이 백성들이 하고 싶어하는 바를 따르니 천하의 민심이 귀부하고 무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왜 [[한무제]]랑 똑같은 짓을 하느냐는 비판이었다. 사실 상홍양(한무제)이나 왕안석이나 외부의 적(흉노, 요-서하)을 막기 위해 이런 정책을 추진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동파가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무제나 상홍양은 흉노를 막을 재정을 만들어 실제 흉노 원정에 제대로 쓰기라도 했지 왕안석의 신법은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점에서...말 부터가 그런데 무제는 경제 시기부터 지어진 군마용 말목장을 더 지어 말을 기르게 했지만 왕안석의 보마법은 군마와 짐마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신법 중 가장 논쟁거리였던 청묘법 또한 정부가 민간 사금융보다 더 높게 [[고리대금|고리의 이자로 돈놀이]]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더해서 청묘법이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된 하북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단체로 존경받던 전 재상이자 명신 [[한기(북송)|한기]]에게 몰려가 "청묘인지 뭔지 하는 것 좀 황제폐하께 제발 없애달라고 해주십쇼. 이것 때문에 죽겠습니다."라고 집단행동까지 했고[* 당시 한기는 재상에서 스스로 물러나 지방관을 맡았는데 재상 시절 공명정대한 판결과 꼼꼼한 일처리 등으로 백성들과 농민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청묘법이 시행될 당시 하북 안찰사로 부임해 있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왕안석 주도로 하북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청묘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이때 하북 농민들은 대출이 필요없음에도 청묘법 신청을 강요받고, 청묘법과 관련된 모든 비용들까지 농민들에게 전가해 불만이 쌓였다. 여기에 더해 이전까지 경험하지도 못한 수탈 방법들까지 나오면서 견디다 못한 하북 농민들이 결국 가장 존경하고 믿을 만한 전 재상이었던 한기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농민들의 단체 항의 이후 한기가 하북일대를 돌면서 직접 농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사를 했는데 한기의 생각보다 그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한기는 신종에게 급히 조사결과와 함께 당시 청묘법으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사례까지 상소까지 올려 그 상황을 전했다. 이때 신종은 왕안석의 말만 믿고 있다가 한기의 상소문을 직접 읽고 “과연 한기는 명신이고 충신입니다그려. 백성들이 이렇게 하소연하고 청묘법이 이렇게 심각한데 폐지해야 하는 게 아니오”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따라서 신종은 주변 신하들에게 청묘법을 폐지하라고 말하기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이때 신종의 말을 들은 왕안석은 오히려 분에 못 이겨 한기와 신종을 싸잡아 강하게 비난했고, 퇴궁 이후에도 화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신법당과 왕안석의 주장을 지지해주던 인사들까지 이를 비판했다. 또 보마법은 잠깐 지나가는 글에도 비현실적이라는[* 군마와 짐말은 다른데 짐말을 군마로 쓰겠다는 이야기냐는 이유.] 비판이 이어진다. 즉, 왕안석의 개혁은 말만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을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기득권을 대체해 대지주, 대상인의 위치를 독점해 민간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정부가 사채놀이를 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짓이 아니냐는 것이 정책 자체에 오랫동안 가해진 비판이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홍대용]]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면 세손([[정조(조선)|정조]]), 유학자(실학자 포함)들이 한 목소리로 왕안석을 조롱하곤 했다. >"여기서 왕안석이 재상이 된 것이 역사의 쾌사입니다." >"어찌 그렇소?" >"그러지 않았다면 왕안석이 간신인 것이 밝혀지지 않고 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저런 분위기였다. 왕안석이 얼마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그 이전에 [[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측은 자신들이 왕안석 같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왕안석을 옹호했다. >정조 : "왕안석은 사마광과 비교하면 인품은 몰라도 재주는 뛰어나지 않소?" >다른 신하들 :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정치를 오래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것입니다" >[[채제공]] : "옛법을 고치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사마광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4030_002|#]] >정조 : "그렇소. 주자도 왕안석이 명신이라 일컬었소." 두 번째 비판은 왕안석의 태도와 신법당에 대한 것이다. 먼저 왕안석은 중앙 데뷔 당시부터 특유의 성격과 그 성품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당시 조정 내에서 한기 등 경험 많은 원로들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오규같은 이들조차 함께 일할 당시 경험한, '당연한 것조차도 자기가 싫으면 무조건 자기합리화하며 듣지 않는 태도'와 업무 처리에서도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채 잘못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외고집' 기질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한기는 왕안석이 그 학식과 재능으로는 한림학사로는 어울린다고 했지만 재상감은 아니라고 신종에게 조언했다. 또 왕안석 중용 의사를 밝힌 신종에게 왕안석을 경험해본 인사 중 간관 출신인 오규는 왕안석이 한결같이 일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당연히 해야 될 세수나 목욕조차 하지 않고, 시선도 신경 안 쓰는 이해못할 행동들과 세상물정에 어두운 일처리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신종은 원로들의 조언이나 군목사로 함께 일한 이후 경험을 토대로 기용에 반대한 오규 등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의견을 낸 장지기에게는 과거 그가 구양수를 비판할 때 개인가정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주장처럼 왕안석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된 성격과 업무 스타일은 개혁 집행과정에서 갈수록 문제를 발생시킨 결과, 왕안석을 지지했던 이들조차 정적으로 만들어 결국 왕안석은 실각, 송나라는 개혁의 실패와 부작용으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악영향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왕안석은 빠른 개혁을 위해 지지층을 최대한 늘리려 노력했고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이들을 대거 개혁 업무 전면에 추천해 중앙 요직을 차지하게끔 했다. 따라서 신법당은 순식간에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렇게 세를 늘리다 보니까 여혜경, 채경, 증포와 같이 영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신법당의 대부분 구성원을 이뤄버렸고, 왕안석 생전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해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 신법 시작 전 사전단계(세금징수를 위한 토지 결수 조사 과정)부터 이런 인물들 때문에 성과를 냈음에도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 중앙에서 어떤 개혁을 하는지 크게 관심없는 농민들은 왕안석이 보낸 측근들이 온 동네를 돌면서 온갖 이유로 자신들을 수탈하자 이들을 파견했다는 왕안석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한다.] 왕안석과 학문적 성향이 맞고 잘 통한 까닭에 일찍부터 절친이었던 여혜경의 경우에는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해준 뼈있는 조언처럼, 자신과 왕안석이 실각될 위기에 처하자 왕안석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다시 복직한 상황에서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 과거 왕안석의 발언들을 증거로 내세워 공격해 사임하게 만들었다. 또 증포의 경우, 신법의 열혈 지지자이자 추진 세력이었음에도 결국 왕안석이 실각하는 데 합세했다[* 증포의 경우, 철종 사후 후계선정에서도 평소 자신이 시기하던 장돈을 반대해 휘종이 즉위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휘종 대의 간신 채경을 추천해 그가 재상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왕안석 죽은 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파당을 짠 것도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조선시대에 붕당이 성행해서 알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사실 조선은 붕당을 경계한 국가다. 조광조가 쫓겨난 것도 이준경의 유소가 비난거리가 된 것도 붕당 때문[* 실제로도 초기에는 붕당이라면 알레르기라도 돋는 양 반응하던 분위기에서 "군자의 당 소인의 당은 구분해야 한다.'(인조 시기) "충신의 당 역적의 당은 구분해야 한다."(영조 시기)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게다가 갈수록 극단화된 점을 보면 문제는 더 심해져간다...]] 거기다 그 파당의 내부 상태가 이러니 왕안석을 포함한 신법당 전체가 간신이라는 후대의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사실 왕안석이 질이 나쁜 인물들을 믿고 그들을 대거 추천해 키웠다는 점과 파당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간신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이다. 그 외에, 최근에는 저런 조치들로 북송을 구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북송 시대 [[송휘종]] 무렵에 승자는 [[채경(북송)|채경]]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측이었고, 구법당은 역적으로 몰려 모욕당했다. 또한 신법도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정책이 발굴되었고 구법당 옹호측인 [[주자(철학자)|주희]]도 신법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북송이나 남송이나 망했기 때문. 다만 북송의 멸망의 원인은 송신종부터 이어온 당쟁에도 있지만 송휘종의 사치와 낭비도 한몫 했으며 채경이 비록 신법당 측이라지만 그가 제대로 된 신법 정책만을 한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북송이 망한 결정적 원인은 막장 군주인 송휘종과 북송의 잘못된 외교정책에 있었다.[* 북송이나 남송이나 중요한 점은 내분으로 망하지 않고 외적의 침공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진, 한, 신, 서진, 수, 당, 명 이 국가들은 모두 통일왕조로서 죄다 내적 문제가 심각하여 망했다는 점에서 같다. 그럼 송나라는 어땠냐면 송은 제법 내적 문제는 괜찮았다. 북송은 송휘종의 막장 통치로 반란이 잦았지만 그게 딱히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북송 멸망 후 악비 같은 구국영웅들이 나서고 유예 같은 반례도 있기는 하지만 금나라에 의해 초나라 황제로 옹립된 장방창이 오히려 남송으로 귀순하는 등 보기 드문 일도 벌어졌다. 남송도 마찬가지로 남송의 내분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면 당시 세계제국을 이룬 몽골을 상대로 44년에 걸쳐 맞설 수 있었을까?] 아무튼 이제나 저제나 평가는 "현명한 개혁자 왕안석이 수구꼴통들의 음모에 매장당했다."나 "간신 왕안석의 사악한 음모가 나라의 수명을 깎았다"로 갈린다. 물론 세상 모든 정치가 이렇게 나뉜다고 봐야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