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안석 (문단 편집) == 결과 == 왕안석의 개혁안은 제대로만 된다면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이었으며,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생각과 달리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제도 자체가 허점도 많고 부정부패, 고리대가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심화시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가 터져나왔다. 당장 대부호들이 대부분 기존 기득계층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반대파를 구법파(舊法派)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신법파(新法派)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더해서 왕안석을 지지하던 관료들이나 왕안석 찬성세력인 신법파 내부에서도 전보다 더 심해진 사회 부작용, 너무 급격하게 밀어붙이는 개혁 속도 등을 이유로 왕안석을 비판했다. 희녕변법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던 1074년 희녕 7년, [[허베이 성]]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와 [[내시]],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인 퇴진운행을 벌였다. 더해서 신법파 내부에서도 급격한 왕안석의 개혁에는 반대한 [[장돈]][* 건주 포성 사람으로 자는 자후(子厚). 어린 시절부터 그 재능이 뛰어났고 왕안석, 소식, 소철, 사마광 등과 친구였다. 본래 차갑고 냉정한 성품과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탓에 재능이 뛰어나고 사심없이 일처리를 했음에도 늘 구법파와 신법파 모두에게 적이 많았다. 그는 친구 왕안석이 신종의 희녕변법 때 중용되면서 편수삼사조례관에 임명되자, 변경 지역을 군사들을 이용해 개척하고 원주 설치 등을 이뤄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한 신법파임에도 왕안석과는 의견을 달리해 좌천되기도 했다.], [[증포]], 여혜경[* 자는 길보(吉甫). 복건 천주(福建 泉州) 사람으로 신법 추진과 시행하는 동안 왕안석의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왕안석은 그를 주요 관직에 추천하고 신뢰했다. 하지만 동생 왕안국은 여혜경을 신뢰한 형에게 “아첨꾼 같으니 믿지 마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고, 여공저는 간사하다고 그를 평가했다. 아울러 정적인 사마광조차도 여혜경에게 ‘험교’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여혜경을 경계했고 왕안석에게 편지를 보내 ‘아첨하는 무리는 세를 잃으면 언젠가는 왕안석 자네를 팔아먹고 배신할 것이오. 그를 경계하게나”라고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안석은 사마광의 진심어린 조언에도 여혜경을 신뢰했다.]이 신법의 부작용을 비판했고, 원래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조차 청묘법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이에 신종도 왕안석을 해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훗날 금릉에 머물던 왕안석은 종종 ‘복건자(福建子)’ 글귀를 쓰면서 복건 사람인 여혜경이 망쳤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여혜경 역시 잠시 이 지역으로 귀양을 오게 됐는데, 같은 곳에서 머물던 왕안석이 안부를 건네며 덕담과 위로를 건넸음에도 이를 외면한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여씨의 됨됨이에 결정적으로 실망해 저런 말이 나온 것으로 추정.]. 신법은 왕안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신종의 재위 기간에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난다.[* 당장 왕안석의 문하생이자 왕안석의 정책을 열혈적으로 지지하던 증포는 시역법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증포의 시역법 비판, 여혜경의 비판은 왕안석이 사임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친구이자 신법파였던 장돈, 처음에는 왕안석을 지지하던 구양수 등도 왕안석의 신법 중 일부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 적이 있다.] 수완은 뛰어났지만[* 일례로 당시 낙학(洛學)의 거두 [[정이]]가 사는 고을을 여혜경 무리가 통과한 적 있는데, 100명이 넘는 큰 행렬이었음에도, 행차가 끝난 후에야 사람들이 알게 됐을 만큼 조용하면서도 신속했다고 한다.] 구법파 사람들에게도 간사하다 평가받던[* 경골지사처럼 강경하게 왕안석 신법을 옹호해 신법당에서 입지를 확보했지만, 반대편에서는 특히 [[사마광]]이 명분과 실제가 미묘하게 다른 면모를 지적하며 왕안석에게 주의할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여혜경의 경우는 평소 왕안석의 말을 기록해뒀다가 왕안석의 세력이 약해질 때 즈음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의 것들만 골라 황제에게 참소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했지만, 이때 그의 복직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던 여혜경이 앞장서 ‘왕안석이 유가의 도를 배신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여겨 속이고 있다’며 신종에게 왕안석을 탄핵하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결국 왕안석은 1076년에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 왕안석이 복귀하였다가 다시 은둔하는 기간동안 개인적인 아픔도 겪었다. 그가 아끼던 동생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왕안국이 병으로 사망했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아버지의 정치적 동지이자 뛰어난 학문적 지식과 재능을 가진 아들 왕방마저 폐병으로 요절했다.] 신종이 죽은 후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되고 곧 신법이 폐지된다. 이에 개혁을 일부 지지하던 [[소식(시인)|소식]][* 한국에는 [[소동파]]로 알려져 있는 정치가이자 [[시인(문학)|시인]].]을 비롯해 이런 반동적인 조치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우려한 이들이 많았는데,[* 사실 신종의 모후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왕안석의 신법을 강하게 반대했어도 그 전체가 문제가 있다고 하지는 않았고, 사마광을 재상으로 임명했음에도 최초에는 신법 전체를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얼마 후에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을 초래해 송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된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 이근명(2014). “왕안석 신법의 시행과 臺諫官”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이근명(2010) 『역사문화연구 제35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