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정팅 (문단 편집) ===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까지 === ||[[파일:왕정정.jpg]]|| || 1931년의 왕정팅 || 1930년 12월 4일, 행정원이 개조되자 외교부장에 재임명되었다. 1931년 6월 1일, 훈정 실시가 선포되면서 6월 13일 국민당 제3기 5중전회에서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 6월 15일에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왕정팅은 국민정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로부터 무력으로 저항하지도 않으나 외교적으로 굴복하지도 않겠다는 방침을 하달받았지만 이로 인해 [[후한민]] 등에게 비난을 받고 사퇴를 요구받기도 했다. 결국 1931년 9월 28일, 난징 중앙대학 학생들이 왕정팅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그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외교부장직을 사퇴하고 [[스자오지]]에게 외교부장 자리를 내주었다. 1931년 12월 30일, 4차 전국대표대회의 결의에 따라 수정국민정부조직법이 발표되었고 왕정팅은 국민당 중앙정치회의 외교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이를 확대개편한 특별외교위원회가 수립됨에 따라 왕정팅은 [[천밍수]], [[쑹쯔원]], [[샤오위안충]], [[장췬]], [[우차오수]], [[구멍위]], [[쿵샹시]], [[뤄원간]], [[구웨이쥔]], [[우톄청]], [[궈타이치]], [[다이지타오]], [[천궁보]] 등과 함께 특별외교위원에 임명되었고 다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옌후이칭]]을 추천하여 특별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초빙하였고 자기 자신은 구타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특별외교위원회 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행정원장 [[쑨커]]에게 조속히 항전을 결정할 것을 촉구했으며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자 일본군과의 협상에 참여, [[송호정전협정]] 체결을 이끌어냈다.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개최되자 적극지원하였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중국의 스포츠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5월,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의 체결에 분노한 주미 중국 대사 [[스자오지]]가 항의의 표시로 대사에서 사퇴함에 따라 2대 주미 중국 대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38년까지 미국 대사로 재직하다가 [[후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퇴직하여 완전히 정치에서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