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문단 편집) === [[호법운동]]에서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 수립까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png|width=100%]]}}}|| ||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하는 왕징웨이 || [[1919년]] [[중국국민당]]이 창설되고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왕징웨이는 [[중화민국 호법정부]], [[2차 호법운동]] 등에 참여하며 쑨원을 보좌했고 [[영풍함 사건]] 직전에는 [[천중밍]]과의 화해를 주장하기도 했다. 쑨원은 점차 그에게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등 여러 요직을 맡기면서 점차 [[후한민]], [[랴오중카이]], [[다이지타오]]와 함께 국민당의 주축 세력의 리더이자 장차 [[쑨원]]의 후계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이 죽자 국민당은 본격적으로 권력 투쟁에 들어간다.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재정부장이자 국민당 좌파의 중요 인물로서, [[중국공산당]]과의 지속적인 협력을 주장하여 [[제1차 국공합작]] 달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의 총애를 받았고 [[후한민]]과도 친한 사이었다. [[후한민]]은 국민정부의 대리 대원수이자 중국동맹회 창단 멤버, 국민당 우파의 수장이었으며 여러 혁명활동에 참여하여 오랜 경력이 있으며 강경한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 반면 왕징웨이는 좌파이긴 했지만 중도파의 역할을 자처했으며, 당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으로 지지도가 높았지만 그만큼 자기 기반이 약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고 그의 유서를 작성하며 쑨원의 마지막 후광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왕징웨이의 영향력은 앞선 랴오중카이, 후한민에 비하면 결코 앞서지 않았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힘인 군사력은 광둥군을 거느리는 [[쉬충즈]]와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당군을 장악한 [[장제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왕징웨이를 지지해주어 그는 주석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왕징웨이는 광저우 대원수부를 개조하여 7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였고 같은 해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하자]] 이를 구실로 [[장제스]]와 합작하여 [[정적]]인 군정부장 [[쉬충즈]]를 숙청하고, 외교부장 [[후한민]]도 그의 사촌동생 후이성이 암살에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소련으로 추방함으로서 첫 번째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장악하여 왕징웨이는 국민정부 주석,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당대표 직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적 경쟁자였던 후한민은 "보로딘이 기회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왕징웨이를 이용하여 국민당 내 공산당의 세력확장을 꾀한 것"이라고 비난했고, [[헹크 스네이블릿|마링]]은 회고록에서 "광저우 국민정부는 표면상 왕징웨이가 주도했으나 실제로는 랴오중카이가 이끌었다"라도 썼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ng_Jingwei_and_Chiang_Kai-shek.jpg|width=100%]]}}}|| || [[중산함 사건]] 직전의 왕징웨이와 장제스 || 그러나 왕징웨이는 계속 장제스의 군사력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왕징웨이는 광동 세력과 접촉하다 장제스와 불화를 빚게 되고 '''[[중산함 사건]] 과정에서 믿었던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키고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 등 군사실력자들, [[소련]] 고문들까지 모두 자신을 외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라기보단 그냥 신뢰했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대권주자라기보단 그냥 군사실력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쉬충즈]] 숙청,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 좌파를 제압하고 당시 국민정부 주석이라는 명목상이나마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던 왕징웨이가 외유를 떠나 빈 국민당의 자리를 장제스가 영도하며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