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문단 편집) === [[장왕합작]] 시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장왕합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16c8b41770d0bcc285a.jpg|width=100%]]}}}|| ||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시절 타임지에 실린 왕징웨이 || [[1932년]] 1월 자신을 무시하는 광동파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어제의 적인 장제스와 협력하여,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자신이 [[행정원장]]이 된다는 조건으로 개조파-친장파 합작을 성사하여 [[장왕합작]]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왕징웨이는 당권을, 장제스는 군권을 장악하고 1935년까지 두 사람이 난징 정부를 영도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크게 견제했기 때문에 합작이란 말이 무색하게 왕징웨이의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자기 분야에 있어서도 장제스의 심복들에게 밀려 기를 펴지 못했다. 이때 왕징웨이는 [[나치 독일]]에 외교 방문을 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친분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점차 극우적 성향으로 변하여 유럽 [[파시즘]] 계열의 극우파 세력을 새로이 조직하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2년 1월 나치와 왕징웨이.png|width=100%]]}}}|| || 1942년 1월 주중 독일 대사 게오르크 하인리히 슈타머(오른쪽), 주중 이탈리아 대사 프란체스코 마리아 탈리아니 데 마르치오(왼쪽)와 건배하는 왕징웨이 ||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열하사변]] 등 일본의 도발이 연이어 이어졌고 일본은 [[화북분리공작]]을 벌이며 화북을 중국에서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능력이 없던 국민정부는 일본에 계속 저자세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국내에선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었다. 왕징웨이는 1933년 8월 18일 외교부장 [[뤄원간]]이 [[당고정전협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하자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부저항주의>, <항전준비론>, <일면저항 일면교섭>, <선안내 후양외> 등의 적극적인 대일 유화책을 전개하였다. 이걸 두고 공산당과 반장 군벌들은 국민정부의 친일성 운운하며 정치적인 공격 소재로 삼았으며 반일감정에 부풀어 오른 학생과 지식인들의 불만은 가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왕징웨이 뿐만 아니라 장제스도 동의하는 정책이었으며, 중국이 일본에 맞설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일본이 국민정부의 반일 여론 감독을 감시하며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었으니 국민정부가 표면상 반일 여론을 탄압하며 일본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32년 5월 감찰원이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체결한 [[송호정전협정]]을 구실로 왕징웨이를 탄핵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명목상 "왕징웨이가 강화조약을 입법원 심의를 거치지 않고 행정원에서 일방적으로 체결했다"는 이유였지만 그 속에는 일본에 대한 왕징웨이의 유화적 태도가 탄핵의 계기였다. 왕징웨이는 친일파 이름을 뒤집어쓴 채 8월 초 행정원장에서 사직하여 다시 유럽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에게만 이런 오명이 씌어지는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직서에 불만을 한가득 적어놓고 떠났다고 한다.[* 주된 내용은 대일정책과 관련하여 장제스와의 갈등, 재정 문제와 관련하여 쑹쓰원과의 갈등, 장제스의 사조직인 [[CC단]]과 같은 [[장왕합작|장제스와의 합작]]에서 자신의 실권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결국 1935년 11월 1일, 5기 6중전회 개막식에서 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에 묵인하는 국민정부를 징벌한다"라는 명분을 가진 [[왕징웨이 저격 사건|전직 군인 출신 기자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았고]] 신속히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은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당시 의료기술로 척추에 맞은 세 번째 총알을 빼낼 수가 없어 독일까지 가서 치료했으나 끝내 제거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이 추후 골수종양으로 번져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후 그는 다시 요양과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장제스의 수하인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가 지목되었으나 알고 보니 광동파 [[리지선]]과 [[천밍수]]의 소행이었고 원래 암살 목표는 왕징웨이가 아니라 장제스였으나 그날 장제스가 불참하면서 왕징웨이로 목표가 수정된 것이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n94.zhaoxinpeng.com/a08b87d6277f9e2fd005684f1f30e924b899f341.jpg|width=100%]]}}}|| || 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 이후 [[시안 사건]]이 발생하자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서둘러 귀환했지만 왕징웨이가 귀국하기도 전에 장제스가 풀려나면서 일은 다 끝나버렸다.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거쳐 1937년 1월 14일 독일 배를 타고 상하이를 통해 귀국한 이후 정계에 복귀,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에 추대되면서 외형적인 장왕합작이 복구되긴 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돌아서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을 주장하려는 장제스의 [[국공합작]] 정책에 반대하며 기존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고수했다. 이때부터 왕징웨이가 친일파로서의 길을 준비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왕징웨이가 아예 태초부터 친일 행각을 벌인 것은 아니고, [[만주사변]] 당시에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전할 것을 권하였지만 장쉐량은 거부했으며, 결국 만주가 허무하게 넘어가는 것을 본 왕징웨이는 장쉐량을 호되게 질책하며 자결하라고까지 이야기하였다.]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높은 직위에 앉혀는 주었으나 실권을 주지 않아 왕징웨이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훗날 천궁보의 말에 따르면, 군무는 [[장제스]], 재정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 당무는 장제스의 조직인 [[CC단]] 계열의 인물들이 모두 차지하여 왕징웨이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1938년 3월 우한에서 열린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장제스가 국민당 총재, 왕징웨이가 국민당 부총재로 선출되었는데 왕징웨이는 자신이 총재가 되지 못한 것에 크게 불만을 표하였다. 이로써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하였다.[* 사실 왕징웨이의 불만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 왕징웨이는 일본 유학 시기부터 쑨원과 함께한 그야말로 '''국민당 원로 중의 원로'''이다. 그런데 어디 상하이 뒷골목에서 굴러먹다 온 장제스라는 자가 왕징웨이 자신의 정통성이 가득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국민당의 총재 자리까지 먹어버렸으니 왕징웨이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