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문단 편집) === 비참한 말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1년의 왕징웨이.jpg|width=100%]]}}}|| || 1941년의 왕징웨이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9UblJCgZsK0)]}}}|| || 1942년 왕징웨이의 신년사 || 왕징웨이는 일본군과의 화친이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 내에서의 파벌은 국민당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독했다. 여러 번의 혼란과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무책임함이 더해져 결국 정권 수립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었다. 우선 정권이 발족하고 수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일본이 간신히 승인했고, 기존의 일본 괴뢰정권들은 왕징웨이에게 크게 반발했다. >"외부에서 누군가 우리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가 일본인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하고 있는데, 여러분, 오늘 회의장에 일본인이 있는지 보세요." >---- >1939년 8월 30일,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의 폐막사.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왕징웨이는 그의 정권이 자주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지만, 몇 차례의 권력 회복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고 [[왕징웨이 정권]]은 [[괴뢰국]]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일본군은 그의 이름으로 점령지에서 무척이나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유서라고 공개된 문서를 보면, 왕징웨이는 그래도 자신이 [[비시 프랑스|일본에 붙음으로서 점령지 민중들의 삶을 지켜냈다고 자부한 모양]]이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49187|왕징웨이의 유서 1편]], [[https://cafe.naver.com/booheong/149517|2편]], [[https://cafe.naver.com/booheong/151323|3편.]] 1964년에 알려졌지만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은 듯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수술받는 왕징웨이.png|width=100%]]}}}|| || 탄환 적출 수술을 받는 왕징웨이와 적출된 탄환[* 탄환이 검은색에다 둘로 갈라져 있는데, 저격 후 약 1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 이러한 와중에 왕징웨이는 등에 박혔던 총알로 인한 통증이 심해져 1943년 12월 19일 난징의 일본육군병원에서 탄환 적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왕징웨이는 다리가 마비되었고 알 수 없는 발열 등에 시달렸다. 왕징웨이를 진찰한 일본 교수진은 척추골 압박에 의한 신경증상으로 판단하고 3월 3일, 일본으로 날아가 나고야 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진행하였다. 최종 진단명은 [[다발성 골수종]]. 일본은 평소 왕징웨이가 좋아하던 꽃인 [[매화나무|매화]]에서 딴 '매호'를 왕징웨이의 암호명으로 사용하였으며 매화나무 배지를 단 인물만 병동에 출입할 수 있는 등 철저히 극비로 치료하였다. 당시 일본은 물자 부족으로 석탄을 조달하기 힘들었는데, 왕징웨이 병실에는 특별히 석탄을 보급해주어 난방을 해주었다. 5월에는 냉방이 필요하자 규슈까지 가서 냉방기를 가져왔다. 일본은 최고의 의료진을 동원해 치료에 열중하였으나 왕징웨이는 결국 1944년 11월 10일 오후 4시 20분, [[백혈병|골수암]]으로 사망하였다. 왕징웨이는 이틀 후인 12일 난징으로 운구되어 그곳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왕징웨이의 장례식은 너무나도 인기가 없던 나머지(...) 참석자들에게 당시 1주일치 봉급인 20위안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은 이후 [[왕징웨이 정권]]의 주석대행 자리는 [[천궁보]]가 이어받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이 항복하고 왕징웨이의 정부는 해체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1PNEzZbmisM)]}}}|| || 왕징웨이의 장례식[* 1분 19초에는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2분 29초에는 왕징웨이의 측근 [[천궁보]]가 등장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폭파 이전 왕징웨이의 무덤.jpg|width=100%]]}}}|| || 폭파 이전 왕징웨이의 무덤 || 왕징웨이는 본래 순친왕 암살 당시 희생된 동지들이 묻혀 있는 광저우에 함께 묻히고 싶었으나,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단 유해는 [[유언]]에 따라 [[쑨원]]의 곁에 안장한 후 전쟁이 끝나면 광저우로 옮겨 묻어 다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왕징웨이 자신도 자기 무덤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는지 자신이 묻힐 묘역을 단단한 콘크리트로 조성해달라고 하였으나[* 심지어 아내 [[천비쥔]]의 조치로 왕징웨이의 콘크리트에 철강 조각을 자그마치 5톤이나 섞어 부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장제스]]는 [[허잉친]]에게 [[부관참시|무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했다.]] 1946년 1월 21일, 허잉친의 밀명을 받은 육군총부 참모장 소의숙, 육군 총공병부장 마숭륙, 74군 군장 구유달, 난징시장 마초준 등이 왕징웨이 무덤 폭파 계획을 집행하였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시신을 파내 청량산에서 불태우고 왕징웨이의 무덤은 다이너마이트 150킬로그램을 동원하여 2차례에 걸쳐 폭파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징웨이의 셋째 딸 왕문순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따지자 허잉친은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답변하지 않았다. 이후 폭파에 참여했던 구유달은 왕징웨이의 망령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환상에 시달렸으며 [[국공내전]] 중 산동성에서 공산군과 교전하다가 갑자기 "왕 선생님!"을 연호하더니 권총으로 자살했다. 왕징웨이의 가족들도 처벌을 면치 못했는데 아내 [[천비쥔]]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국민당 정권이 [[국부천대|대만으로 도피]]한 후 공산당은 천비쥔에게 전향을 권유했지만 천지쥔이 거부하자 석방시켜주지 않았고, 1959년 6월 [[심장병]]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광동성장을 지낸 처남 진춘포는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괴뢰군 육군소장을 지낸 장남 왕문영은 사형이 예상되었으나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한 것으로 인정되어 징역 7년, 공권박탈 7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차남 왕문제는 광동교도총대 대대장을 지냈다가 이후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왕징웨이의 장녀 왕문성의 남편인 사위 하문걸도 징역 2년 6개월, 공권박탈 5년,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이후 왕문영, 왕문성, 왕문순, 왕문제는 모두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며 차녀 왕문빈은 인도네시아에서 천주교 수녀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