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충후이 (문단 편집) === 호인정치 === 이후 [[푸단 대학]] 대학 부총장으로 재임했으며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이를 크게 비판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1917년 베이징으로 상경하여 법률편찬회 회장에 취임했다. 1918년 12월, [[량스이]] 내각에서 사법총장에 지명되었다. 1919년 2월 16일, 베이징의 각계각층가 설립한 국민외교협회에서 [[량치차오]] 등과 함께 이사로 천거되었다. 또한 국제연맹동지회가 결성되면서 역시 이사로 선임되었다. 1919년 [[5.4운동]]이 발생하여 32명의 학생이 조여림의 집을 불태운 죄로 체포되자 학생들의 석방운동을 주선하여 정부로부터 학생들 석방을 보장받았다. 1920년 대리원 원장, 형법위원회 회장, 법리위원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8월, [[워싱턴 회의]]에 중국측 대표단으로 주미 중국공사 [[스자오지]], 주영 중국공사 [[구웨이쥔]]와 함께 참석하였다. 그 결과로 1922년 2월 구국공약이 체결되었다. 1922년 5월, [[뤄원간]], [[차이위안페이]], [[량수밍]], [[리다자오]], [[후스]], [[뤄원간]] 등 16명과 함께 <우리의 정치주장>을 발표하여 호인정치를 통해서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벌]]이 승리하면서 대총통 [[쉬스창]]과 [[량스이]] 내각이 모두 퇴진하고 [[리위안훙]]이 총통에 옹립되자 법통중광이 이루어지고 구국회와 약법이 회복되었다. 법통중광 이후 첫 내각은 [[옌후이칭]] 내각이었으나 옌후이칭 내각이 각원들의 취임 거부로 붕괴되자 뒤이어 [[탕사오이]]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탕사오이는 취임을 거부하였고 [[우페이푸]]가 탕사오이 임명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공백기가 발생했고 이 기간 동안 왕충후이가 국무총리 대행을 맡았다. 국회와 직예군벌의 동시압박에 왕충후이는 피로를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고 결국 탕사오이 내각이 최종적으로 붕괴되자 리위안훙으로부터 정식으로 중화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낙양파와 무당파 인사를 중심으로 내각을 꾸려서 낙파 내각, 호인 내각으로 불렸다. 우페이푸가 개명장군으로 불리는 등 군벌 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노동권 신장에 관심이 있던 인물이라 왕충후이도 우페이푸에게 상당히 기대를 건 상태였다. 하지만 [[후스]], [[차이위안페이]]가 요구하는 연성회의의 소집, 1922년 경제위기, 국회에서 요구하는 낙파 각원의 축출 요구를 놓고 후원자인 우페이푸와 국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결국 10월에 자신은 정식 국무총리가 아니라면서 사퇴의 의사를 밝혔지만 리위안훙의 만류로 사퇴를 번복했다. 하지만 11월에 발생한 [[뤄원간 사건]]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1월 25일에 내각 총사퇴를 결정한다. 이후 1924년 [[쑨바오치]] 내각에서 사법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수정법률관 총재로 재직하였으며 [[구웨이쥔]] 내각에서 교육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중국 국민당에 투항하여 2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중앙감찰위원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