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충후이 (문단 편집) === 중화민국 사법원장 ===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난징 국민정부 사법부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0월 8일, 국민정부 조직법이 통과되면서 사법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지명되었다. 1928년 11월 16일, [[사법원]]이 구성되면서 정식으로 사법원장에 취임했다. 1931년 3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훈정 시기 약법이 제정되었는데 [[우징헝]], 소력자, 소원충 등 12명과 함께 약법 제정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헤이그 국제법정 재판관에 임명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법정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헤이그로 부임하기 전 6월 1일, 장제스, 입법원장 대리 소원충,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감찰원장 [[위유런]]과 함께 중화민국훈정시기약법을 공포했다. 이후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사법원장에 재선출되었다. 1929년, 중국의 미래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를 비판하며 철도부장 [[쑨커]]와 함께 상하이로 외유하여 난징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광저우 국민정부 설립에 참여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중앙정치회의 외교조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학생들의 외교부 건물 난입 사건 때 일본인들에게 친일외교의 배후로 몰려서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34년 12월,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1935년 2월, [[히로타 고키]] 일본 외상이 대중 친선을 표명하자 일본을 방문하여 [[오카다 게이스케]] 수상과 [[하야시 센주로]] 육상, 히로타 외상, 외무차관 [[시게미츠 마모루]]와 회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