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치산 (문단 편집) == 출생과 초기 경력 == [[중화민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산서성]]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대부분 [[고등학생]]이 그렇듯이 [[고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삽질을 했다. [[1973년]]에 시베이대학에 들어갔고, 여기서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2년 후 당시 유배중이었던 [[경제관료]] 야오이린(姚依林, 1917-94)의 [[딸]] 야오밍산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된 연구 분야는 청말과 민국초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야오이린이 유배에서 풀려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영전하면서, 82년 왕치산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채용되어 [[공무원]] 생활을 한다. 심지어는 공산당원도 아니었던지라 다른 고위간부들은 스무살 무렵에 시작하는 당원생활을 만 34세였던 83년에 시작하게 된다(...).[* 공산당 고위간부들 중에서는 시진핑처럼 업적을 남기는 대신 무난하게 임기를 보내고, 출신배경이나 운의 덕을 많이 본 인물도 적지 않다. 그에 비해 어딜 가나 빼어난 업적을 낸 왕치산의 출세가 경쟁자들에 비해 은근히 뒤쳐졌던 것은 시작 자체가 늦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리커창]]은 왕치산이 입당한 시기보다도 빨랐던 만 30살에 이미 차관급 공청단 서기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출발선부터 차이가 컸다. 물론 왕치산이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등 계파 수장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계파색이 옅었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때문에 정치적 계파는 혼맥을 통해 편입된 범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모양빠지게도 낙하산으로 장인의 직장에 채용되고 늦깍이 공산당원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이 때부터 가는 곳마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고속출세를 했다. [[1988년]]부터 농촌신탁투자공사 사장, 건설은행 부행장 등 금융계통에서 요직을 맡아 일했고, 93년에는 나중에 총리를 역임하는 주룽지 부총리 겸 인민은행장 밑에서 부행장직을 거친 뒤 97년까지 건설은행 행장을 맡았다. 금융계통에서 일할 때 단호한 개혁파, 시장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다. 고도성장기에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며 서구 경제계 인사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고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주룽지 부총리가 고른 구원투수로서 [[광둥성]]의 금융담당으로 부임한 뒤, 부실기업을 선제적으로 과감히 청산하고 [[아시아]] 각국의 금융위기가 중국에 옮겨붙지 못하게 해 광둥성 부성장으로 승진하고 1998년 5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00년부터 총리가 된 [[주룽지]]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중국 국무원|국무원]]에서 경제체제개혁 판공실 주임으로 일하게 되고,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장관급)으로 승진했으나 장관급 중에서는 한직인 변방 [[하이난 성]] 당서기를 맡아 이후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 그를 각별히 신임했던 주룽지는 그를 인민은행 행장으로 밀었으나 장쩌민이 반대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운이 따라줬는지 바로 기회가 찾아오는데, 부임 5개월 만에 [[SARS]] 대응에 실패하여 경질된 전임 멍쉐농[* 왕치산의 매형으로, 왕치산과는 반대로 중국 최악의 관운으로 유명하다(...) 부임 석 달만에 SARS 대응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한 뒤 한직에서 4년간 맴돌다 산시성 성장으로 부임하며 다시 기회를 잡았으나, 1년 만에 린펀 탄광 붕괴사고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아무튼 멍쉐농을 경질하면서 요직인 베이징 시장직을 집안사람 왕치산에게 넘겨준 건 야오이린 집안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있던 셈이다. 때문에 사실 시골동네 하이난 서기를 맡아 최고지도부 진입은 아무래도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던 왕치산의 출세에는 능력과 운만큼이나 배경도 상당히 따라준 셈이다.]대신 베이징시 시장을 맡게 된 것이다.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베이징]] 시장 자리에서 [[SARS]]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의 초석을 놓아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