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치산 (문단 편집) == 중앙기율위 서기 취임과 반부패 수사 ==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에 선출되어 [[원자바오]]와 [[리커창]]을 보좌하게 되면서 [[중국공산당]] 중심부에 진입하였다. 경제와 행정 영역에서 고루 성과를 내며 당 내외에서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던지라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은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처음에는 주로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왔던 만큼 경제부총리 격의 상무부총리 직을 맡고 현재의 [[류허]]와 비슷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당대회 이후 예상을 깨고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나 당 징계위원회 위원장와 비슷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당정일치제로 기율검사위는 검찰과 법원 위에 군림하며 모든 당원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만큼 [[검찰총장]], [[대법원장]], [[감사원장]]을 합쳐놓은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장쩌민 시절부터 3개 대표론을 제창하며 자본가들의 입당도 받아들였는데, 따라서 당연히 기업가들도 기율위의 칼날을 피해갈 수가 없다. [[마윈]]이 시진핑 눈 밖에 나서 가율위 조사를 받고 앤트그룹 상장을 포기한 것이 유명하다.]를 맡게 되었다. 이후 서술할 행보를 고려하면 사정정국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던 셈. 기율검사위 서기를 맡는 동안 [[저우융캉]], 링지화, [[구쥔산]], [[쉬차이허우]] 등 시진핑의 정적이었던 '호랑이' 고위 관료들을 줄줄이 처벌하면서 시진핑 1인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덩샤오핑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당내 권력투쟁의 불문율을 깨고, 직전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의 당적을 박탈하고 수감시킨 이례적인 사건으로 왕치산은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런 사정의 칼날은 군부에까지 미쳐 장쩌민이 심어놓고 군부 영향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던 직전 부주석 쉬차이허우, 궈보슝 둘 모두를 처벌하고 당적을 박탈해 시진핑의 군부 장악에도 큰 역할을 했다. 시진핑 1기 기율검사위를 통한 반부패 드라이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석과 총리의 성을 따 정권을 "시-리 체제"로 부르는 전통적 호칭 대신, 시-왕 체제라는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2017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직에서 물러났으나, 공식적으로는 아무 직함이 없는 야인임에도 상무위원 7인에 이은 당서열 8위로 호명되었다. 외부 분석가들은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 판창룽의 경례를 받고 경제분야를 총괄하게 된 [[류허]]와 긴밀하게 대화하는 등 여전한 힘을 과시하는 왕치산을 보고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것임을 확신하였는데, 2018년 3월 결국 국가부주석에 임명되며 예상이 맞음을 증명하였다. 왕치산은 69세로 이미 은퇴연령을 넘어 통상적으로는 모든 공직을 내놓고 은퇴해야 했으나, 1인체제 확립의 최고 공신에 대한 포상의 필요성,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혀 정치적 보호막이 필요했던 왕치산의 입장, 다음 당대회에서 은퇴연령에 도달하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는 시진핑의 입장이 맞물려 공직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