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커민 (문단 편집) === 한간의 길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명망높은 인물을 옹립하여 [[장제스]]의 리더십에 타격을 주려 했다. 이때 물색된 인물이 전 총통 [[차오쿤]], 전 국무총리 [[진윈펑]], [[탕사오이]], [[돤치루이]]의 아들 단홍업,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 직예군벌의 수령이었던 [[우페이푸]], 전 교통총장 조여림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1939년 9월, 특무부 부장에 키타 세이치 소장이 취임한 후 키타는 상하이에 칩거하고 있던 왕커민을 주목하였다. 왕커민은 총통이나 국무총리 경험이 없어 일본이 원하던 수준의 그릇은 되지 못했지만 재정총장을 역임하는 등 어느 정도 명망은 있던 인물이고 재벌들과 잘 아는 사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일본 측은 왕커민을 이용하여 강절재벌들을 국민정부 지지에서 이탈시키고자 했으며 왕커민도 국민정부 수립 후 정치적으로 소외된 화북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일본과 접촉했다. ||[[파일:중화민국임시정부수립.jpg|width=100%]]|| ||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선포를 알리는 괴뢰인사들, 왼쪽에서부터 [[가오릉웨이]], [[치셰위안]], 왕커민, 강조종, 동강, 탕이화, 왕읍당 || 키타 세이치 소장과의 접촉 끝에 왕읍당, 주심, 동강, 탕이화, [[치셰위안]] 등과 함께 정부주비처를 설립하고 1937년 12월, [[난징 전투]]로 난징이 함락되자 국민정부가 소멸된 것으로 간주하고 12월 14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행정위원회 위원장 겸 내정총장에 취임했다. 이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사변대처요강>을 통과시킴으로 화북의 괴뢰정권을 승인하고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 [[지둥방공자치정부]]의 승인을 취소하고 임시정부에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왕커민은 일본군의 협력조직인 유지회를 기반으로 이를 성정부 조직으로 전환시켜 광범위한 대일 협력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1938년 4월 27일,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와 <정부고문약정>을 체결함으로 임시정부의 정무를 일본군 특무부와 사전 협의를 통해 처리할 것을 약속했고 일본인 고문들을 대대적으로 배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