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왕커민 (문단 편집) === 애국적 친일파? === ||[[파일:말년의왕극민.jpg|width=100%]]|| || 잘 알려진 1940년의 모습 || 하지만 왕커민은 [[만주국]]의 괴뢰황제로 옹립된 [[선통제]]나 [[기동사변]]을 일으킨 [[인루겅]]과 달리 매우 강인한 면모와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 협력하지만 동시에 일본군을 멸시하는 '강골기질'과 '항일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도이하라 겐지는 왕커민 옹립을 일찍이 반대했었고 왕커민은 일본군 내부에서 국민정부와 내통하는 배일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1938년 8월, 화북경제개발을 위해 북지나개발회사가 수립되자 왕커민은 일본이 화북경제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행정위원장에서 사의를 표명, 베이징을 떠나 칭다오로 떠나버렸다. 왕커민이 이 정도로까지 강하게 항의하자 일본 측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1월, 국민정부를 말살하겠다는 고노에 성명 역시 왕커민이 일본에 로비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수립되자 유신정부의 대표가 보이는대로 총살해버리겠다고도 했다. 북지나방면군은 이런 왕커민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관동군과의 경쟁 때문에 왕커민을 용인할수밖에 없었다. 1940년, [[왕징웨이 공작]]에 따라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투항, 난징에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려 하자 [[도이하라 겐지]]의 공작으로 [[우페이푸]]가 옹립되어 자신을 대체하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일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으나 처음부터 왕징웨이에게 주도권을 내줄 생각 따윈 없었다. 1940년 2월, 왕커민은 왕징웨이가 수정삼민주의를 선언하자 이를 두고 화북의 정세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왕징웨이 정권 수립 후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해체되어 왕징웨이 정권 산하 화북정무위원회로 재편되었으나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운용되고 있었다. 왕커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취임했으나 일본 정부가 왕징웨이 지지로 방향을 결정함에 따라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6월에 왕읍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왕커민의 후원자인 키타도 일본으로 귀국조치되었다. 왕읍당 역시 1943년 2월에 주심에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주심이 급사하자 7월에 다시 왕커민이 위원장에 취임했으나 아편중독으로 애꾸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업무를 볼 수가 없어 1944년 2월에 왕음태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임했다. 사실 화북정무위원회 내부의 수장 교체는 왕읍당계, 왕커민계, 치셰위안계 등의 화북 내부의 갈등도 없지 않아 작용한 결과였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관동군과 북지나방면군 특무부대들 간의 알력의 결과였다.(....) 관동군이 강해지면 관동군이 밀어주는 쪽이 떠오르고 북지나방면군이 강해지면 북지나방면군이 미는 쪽이 떠오르는 것. 결국 애국적 친일파니 뭐니 해도 결론적으로 일본의 꼭두각시였음은 변하지 않은 본질이었으며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망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