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통 (문단 편집) === 홍희제, 선덕제 시기 === [[홍희제]]가 즉위한 뒤 후군도독부사(後軍都督府事)를 관장하게 되었고, 태자태보(太子太保)가 가봉되었다.[* 《明史》(卷154):“仁宗即位,命掌後府,加太子太保。”] [[선덕]] 초년에 교지총병관(交阯總兵官) 풍성후(豐城侯) 이빈(李彬)이 병사하자 영창백(榮昌伯) 진지(陳智), 도독 방정이 참장(參將)으로서 대신 베트남 지역을 지켰는데, 모두 직무를 능히 감당할 수 없었다. 당시 람선기의를 일으킨 [[레러이]]가 세력을 확대하여 연달아 군읍(郡邑)을 격파하고 장수와 관리를 죽였다. 진지가 출병하여 레러이와 맞섰으나 연패하였고, [[선덕제]]는 진지의 작위를 깎은 뒤 왕통으로 하여금 정이대장군(征夷將軍)의 인을 차고 군사를 이끌어 레러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레러이의 동생 레티엔(黎善)이 교주(交州)로 진격하자 도독(都督) 진준(陳濬) 등이 방어하였다. 마침 왕통의 대군이 도착하자 명나라군은 길을 나눠 출격하였다. 참장(參將) 마영(馬瑛)이 탁텃현(石室縣)에서 기의군을 격파하자 왕통은 병사를 이끌고 마영과 합쳤으나, 닌교(寧橋)에서 매복에 걸려 군사가 크게 패하고 궤멸하였다. 이를 [[똣동-쭉동 전투]]라고 하며, 전사자가 2~3만 명에 달하였다.[* 《明史》(卷154):“時交阯總兵官豐城侯李彬已前卒,榮昌伯陳智、都督方政以參將代鎮,不協。黎利益張,數破郡邑,殺將吏。智出兵數敗,宣宗削智爵,而命通佩征夷將軍印,帥師往討。黎利弟善攻交州城,都督陳濬等擊卻之。會通至,分道出擊。參將馬瑛破賊於石室縣。通引軍與瑛合,至應平之寧橋中伏,軍大潰,死者二三萬人,尚書陳洽與焉。”] 왕통은 부상을 입고 퇴각하여 교주를 지켰는데, 레러이가 응에안(乂安)에서 그 소식을 듣고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東關)을 포위하였다. 왕통은 기세가 꺾여 은밀히 사신을 보내 레러이를 위하여 책봉을 요청하겠다고 허락하였으며, 타인호아(淸化)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귀속시켰다. 안찰사(按察使) 양시습(楊時習)이 불가하다고 하자 왕통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明史》(卷154):“通中傷還交州,利在乂安聞之,自將精卒圍東關。通氣沮,陰遣人許為利乞封,而檄清化迤南地歸利。按察使楊時習執不可,通厲聲叱之。”] 타인호아의 수장(守將) 나통(羅通) 또한 성을 버리려 하지 않고 지휘(指揮) 타충(打忠)과 굳게 지켰다. 선덕제는 류승(柳升)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돕게 하였으나 이르지 못했다.[* 《明史》(卷154):“清化守羅通亦不肯棄城,與指揮打忠堅守。朝廷遣柳升等助通,未至。”] [[선덕]] 2년([[1427년]]) 2월, 레러이가 타인호아를 공격하였다. 왕통은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레러이를 기습하여 만여 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레러이는 두려워하며 철군하고자 하였고, 명나라군의 여러 장수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할 것을 청하였다. 왕통은 미적거리며 3일 동안이나 출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레러이는 원기를 회복하여 사방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병사를 나누어 쓰엉강(昌江)과 르엉강(諒江)을 점령하였다. 왕통은 모두 병사를 내어 공격하지 않았다.[* 《明史》(卷154):“二年二月,利攻城。通以勁兵五千出不意搗賊營,破之,斬其司空丁禮以下萬余級。利惶懼欲走,諸將請乘勝急擊。通猶豫三日不出,賊勢復振。樹柵掘濠塹,四出攻掠,分兵陷昌江、諒江,而圍交益急。通斂兵不出。”] 이때 레러이가 화친을 요구하자 왕통은 레러이의 서신을 선덕제에게 올렸다. 당시 류승이 찌랑-쓰엉강 전투에서 기의군의 복병에 걸려 전군이 궤멸하였고, 목성(沐晟)의 부대 또한 수미현(水尾縣)에 도달한 뒤로는 전진하지 못했다. 왕통은 더욱 두려워하였고, 이에 급히 레러이의 화친 요구 서신과 사죄를 드리는 표문을 함께 조정에 올렸다. 같은 해 10월, 왕통이 관리 및 군민들을 이끌고 성을 나서 레러이와 함께 단을 세우고 맹세하였다. 이를 동관회서라고 하며, 양측이 철군하기로 약속하였다. 왕통은 레러이에게 금라주단(錦羅綢緞)을 주었고, 레러이도 귀중한 재물을 감사의 의미로 왕통에게 주었다. 12월, 왕통이 태감(太監) 산수(山壽)와 진지 등으로 하여금 수로를 통해 흠주(欽州)로 돌아가게 하였고, 자신은 육군을 이끌고 광서(廣西)로 돌아갔다. 남녕(南寧)에 도착한 뒤 선덕제가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철군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었고, 이에 교지를 포기하기로 확정했다. [[교지(명)|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시기에 명나라는 전후로 병사 10만 명을 파견하였고, 군자금은 백만 석 이상이었고, 물자를 수송하는 비용도 무수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종언을 고하였다. 명나라로 돌아온 관리 및 군민들은 86,000여 명이었고, 전란에서 죽은 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베트남의 토관(土官) 도꾸이중(陶季容), 쩐딘(陳汀) 등은 레러이로부터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달아나 스스로 명나라로 들어갔다.[* 《明史》(卷154):“利乞和,通以聞。會柳升戰歿,沐晟師至水尾縣不得進。通益懼,更啗利和,為利馳上謝罪表。其年十月,大集官吏軍民出城,立壇與利盟,約退師。因宴利,遺利錦綺,利亦以重寶為謝。十二月,通令太監山壽與陳智等由水路還欽州,而自帥步騎還廣西。至南寧,始以聞。會廷議厭兵,遂棄交阯。交阯內屬者二十余年,前後用兵數十萬,饋餉至百余萬,轉輸之費不與焉,至是棄去。官吏軍民還者八萬六千余人,其陷於賊及為賊所戮者不可勝計。而土官向義者陶季容、陳汀之屬,乃往往自拔來歸。”] 선덕 3년([[1428년]]), 왕통이 경사로 돌아갔으나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통을 탄핵하였다. 왕통은 사형을 선고받고 하옥되었으며, 세권을 빼앗기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明史》(卷154):“明年,通還京,群臣交劾,論死系獄,奪券,籍其家。”]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