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현모 (문단 편집) == 생애 == 왕현모의 6대조 왕굉(王宏)은 [[후한]]의 사도 [[왕윤]]의 조카로 하동(河東) 태수를 지냈고 면죽후(綿竹侯)에 봉해졌으며, 192년 [[이각]]과 [[곽사]]가 왕윤을 살해한 뒤 벼슬을 버리고 신흥(新興)에 살았다. 왕현모의 조부 왕뇌(王牢)는 연나라에서 상곡태수를 지냈고 상곡(上谷) 태수가 되었고 청주(靑州)에 살았다. 왕현모의 아버지 왕수(王秀)는 일찍 죽었다. 왕현모는 어린 나이에 玄謨幼而不羣 왕현모의 큰아버지 왕유(王蕤)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서 항상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기개가 고상하고 태위(太尉) [[왕릉(삼국지)|언운]](彦雲)의 풍격을 지녔다. 왕현모는 [[무제(유송)|유유]]가 서주(徐州)로 부임할 때 유유의 종사사(從事史)로 임명되었으며, 유유는 왕현모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424년, [[사회(유송)|사회]]가 형주 자사, 남만교위(南蠻校尉)로 부임한 뒤 왕현모는 행참군(行參軍), 무녕(武寧) 태수가 되었다. 426년, 사회가 패배하여 몰락한 뒤 왕현모는 주요 장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면을 받았으며, 뒤에 장사왕(長沙王) 유의흔의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제수되고 여음(汝陰) 태수를 겸임하였다. 453년,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문제 유의륭을 시해한 뒤 왕현모는 기주(冀州) 자사가 되었다. 이때 무릉왕(武陵王) 유준이 유소를 토벌하고자 거병하자, 왕현모는 유준에게 호응했고 제남(濟南) 태수 [[원호지]]에게 군대를 주어 유준에게 보냈다. 무릉왕 유준은 제위에 올라 유준을 토벌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였다. 왕현모는 서주 자사로 제수되고 도독이 더해졌다. 464년, 효무제가 붕어할 때 왕현모는 유원경 등과 함께 효무제의 고명을 받들었고 외감(外監)의 사무를 맡았다. 효무제의 태자 유자업이 즉위한 뒤, 왕현모는 진북장군(鎭北將軍), 청기2주(靑冀二州) 자사가 되고 도독이 더해졌다. 465년, 유자업이 [[안사백]], 유원경 등을 주벌한 뒤 왕현모를 영군장군으로 삼았다. 왕현모의 자식과 조카들은 모두 왕현모에게 병을 핑계 삼아 이를 거절하라고 권했는데, 왕현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선제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재난을 두려워해서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왕현모는 결국 자식과 조카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조정으로 향했으며, 유자업에게 여러 차례 표문을 올렸고 또한 눈물을 흘리며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고 주살을 그만둬서 백성들을 안심시키라고 간언을 올렸지만 오히려 효무제의 분노를 샀다. 같은 해, 유자업이 수적지 등에게 살해당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건강을 장악하여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유송)|명제]]였다. 명제가 즉위한 뒤 왕현모는 명제의 후한 대우를 받았고 진군장군(鎭軍將軍)이 더해졌다. 당시 왕현모는 다리에 병을 앓고 있어서 수레에 올라 궁을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466년, 거기장군(車騎將軍), 강주(江州) 자사로 전출되었다. 사방에서 명제의 즉위를 지지하지 않는 반란이 일어나자, 왕현모는 수군을 이끌어 남쪽의 반란을 토벌하고자 출정하고 또한 사도(司徒) 건안왕(建安王) 유자인을 보좌하였다. 같은 해,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고 호군장군(護軍將軍)을 겸임하였다. 다시 같은 해, 거기장군, 남예주 자사로 전임되고 도독이 더해졌다. 왕현모는 468년에 훙서하여 장공(莊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왕현모는 아들인 왕심(王深)이 일찍 죽어서 왕심의 아들인 왕궤(王繢)가 왕현모의 후사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