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왕희지 (문단 편집) == 생애 == 그의 [[본관]]이자 출생지는 오늘날 [[산둥성]] [[린이]]시(臨沂市)인 낭야군(琅邪) 임기현(臨沂縣)으로, 진나라가 강남에서 버티는데 공을 세운 [[왕도(동진)|왕도]]의 종질이고, 아버지는 왕광(王曠)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위부인]]이라는 여류 명필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 후에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나 [[위(삼국시대)|위]]나라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나중에는 벼슬길에도 나아가 비서랑(祕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내사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나름 정치적 야망이 있었는지 [[순선]]과 함께 권신 은호의 최측근이 되어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동진)|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왕술]]의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사직하고, 회계 땅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잡아,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을 나누었다. 도가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오석산|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하면서도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남은 필적들도 다 이 세 가지 서체이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물론 왕희지가 서성(書聖)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정말로 왕희지가 고금의 모든 서예가 중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예술은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서열을 매기기가 무의미하다. 게다가 11세기 북송 사람 미불(米芾)이 살던 시절에 왕희지의 글씨는 미불의 기준으로 진품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현대에는 그마저도 사라져서 오늘날에는 왕희지가 쓴 원본을 보고 따라 쓴 글씨, 따라 쓴 글씨를 보고 또 따라 쓴 글씨가 남아 전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4세기 왕희지의 진품 글씨가 어떠한지를 모른다. 그러나 당태종이 왕희지 글씨를 좋아하여 수집하고 강조한 이래로 안진경, 구양순 같은 (당대 이후) 중국 서예사의 중요한 모범이 된 명필들이 왕희지 작품을 따라 쓴 법첩을 보고 공부하였기 때문에, 중국 서예의 진수를 익히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왕희지체를 배우고 임서(따라 쓰기)를 해야 한다. 현대에도 서예가가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왕희지 글씨를 기반으로 만들기를 시작할 정도로 표준적인 모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