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대외적 표현 ===== 삼국통일 이후에도 [[당나라]]와의 사대적 외교 때문에 소극적으로 바뀌지만 외왕내제 체제를 계속 유지했고, [[나당전쟁]] 승리 이후 [[발해]]나 [[일본]]을 자신의 번국 취급하기도 했다. [[대조영]]을 신라의 관직인 [[대아찬]]으로 봉하였고, 일본에 보내는 사신은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칭했다. 《[[상서|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세계관에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었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 측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다. [[당나라]]는 신라의 묘호 사용을 모르지 않아서 당 중종 때 [[신문왕]]에게 구두로 묘호를 쓰지 말라고 조칙을 내렸었지만, 신문왕은 조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에서 신문왕은 [[김춘추|태종 무열왕]]이 [[김유신|흥무대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뤘으므로 그 공이 너무 커 묘호를 썼으니 당나라가 양보해달라고 전했고, 신라를 무시할 수 없었던 당은 그걸 받아들인 것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