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왕내제 (문단 편집) ===== 봉작 ===== 초대 임금 [[동명성왕]]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다물]]국 왕'으로 봉했으며,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송(松)씨이니, 다물국(多勿國) 왕 송양(松讓)의 딸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제3대 임금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략해 임금 [[대소왕]]을 죽이고, 그의 동생에게 '낙(絡)'씨 성을 주어 왕으로 봉하였다. >帶素從弟 ... 投高句麗, 王封爲王置椽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대소왕|대소]]의 종제(從弟)가 ... 고구려에 투항하니, 왕은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두었으며, 그의 등에 낙문(絡文)이 있다고 하여 낙씨(絡氏)라는 성(姓)을 내렸다. >---- >《동국통감》 〈삼국기〉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7월 시간이 흘러 제 19대 임금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아신왕]]을 '노객(奴客)'[*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구려의 지방관 [[모두루]]의 묘지명에서도 노객(奴客)이라는 단어가 '신하'의 의미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즉 '노객'은 당시 고구려에서 [[신하]]를 지칭하던 [[한국식 한자어]]였다는 것이다.]으로 삼아 신하로 두며 [[고구려]]의 관할 하에 두었다는 자료가 〈[[광개토대왕릉비]]〉에 남아있다.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진(고구려)|진]](鎭)의 무덤,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에도 '자손들의 관직이 후왕(侯王)에 이르게 하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뒤를 이은 [[장수왕]] 또한 〈[[충주 고구려비]]〉에서 태자 공(共)과 함께 [[신라]]의 [[마립간|매금]](寐錦)에게 옷을 내려주고 신하로 봉해 [[고구려]]의 관할 하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수왕은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을 '용성왕 풍군'으로 낮춰 부르기도 했다. 이후 풍홍은 [[유송]]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것을 눈치챈 장수왕이 군사를 보내 죽여버렸다. >初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처음 연나라 왕 풍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임금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馮君)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홍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꾸짖었다. >----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26년([[438년]]) 3월 7세기의 〈고성문 묘지명〉에서도 가문의 중시조가 [[모용선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왕에 책봉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작성된 《신찬성씨록》은 고구려에 제후왕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 고려국 원라군 저왕(元羅郡 杵王)의 9세손 연노왕(延孥王) * 고려국 안류왕(安劉王) * 고려국 능기왕(能祁王) * 고려 안악상왕(安岳上王) * 고려국 장왕 주(長王 周[* 장왕의 이름]) * 고려국 구사기왕(久斯祁王) * 고려국주 [[동명성왕|추모왕]]의 20세손 여안기왕(汝安祁王) * 고려국 복귀왕 일사(福貴王 溢士[* 복귀왕의 이름]) * 고려 대방국주 지한법사(高麗 帶方國主 氏韓法史[* 대방국주의 이름]) * 고려국 보륜왕(寶輪王) * 고려국 수모기왕(須牟祁王) 등이 《신찬성씨록》에 적혀져 있는데, 고구려의 제후국이나 왕족의 이름이 나타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