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가 (문단 편집) === 요가 철학의 형이상학 === 요가는 세계관의 많은 부분을 상키야 철학에서 빌려온다. 상키야에 의하면, 세계는 다수의 '뿌루샤'와 단일한 '쁘라끄리띠'로 이루어져 있다. 뿌루샤는 영혼이나 자아 따위로 생각할 수 있으나 정확하게 대응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상키야에 따르면 뿌루샤는 불변한다. 뿌루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항상 편재하는 존재이고, 불멸한다. 즉 상키야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뿌루샤의 성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빚어내는 것으로, 뿌루샤의 본질을 직관하고 자아의 완전성을 깨닫는 순간 해탈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영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나자, 철학자들에게는 세계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생각건대, 작은 천 조각을 찢으면 더 작은 천 조각이 있고 그보다 더 작은 조각이 있을 것이다. 결국 눈에 안 보이게 찢어도 그곳에 미세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미세한 것은? 이 세상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의 지각은 무엇으로부터 비롯하였는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을 미분하고 나면 그곳에는 이제 바로 세계의 본질이 남는다. 그 본질이란 쁘라끄리띠이다. 이 세계는 바로 이러한 쁘라끄리띠의 전개로 말미암아 이룩되었던 것이다. 뿌루샤를 제외하고 나면 쁘라끄리띠만이 남는다. 예컨대 누군가 지금 글귀를 쓰는 중에 있다면, 글을 작성하는 그 생각의 조각조차도 쁘라끄리띠의 영향 아래에 있다. 그의 생각은 불완전할 것이지만, 그의 뿌루샤는 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모든 것은 쁘라끄리띠이고, 쁘라끄리띠의 전개 중에 있다. 따라서 불완전한 '나'를 포함한 모든 세계의 객체는 쁘라끄리띠가 전개되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추리가 가능하다. 뿌루샤가 불변한다면, 쁘라끄리띠는 영변할 것이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그러한 변화의 양태를 지닐 것인가? 상상할 수 있는 세 가지 성질 ㅡ 즉 쁘라끄리띠는 삿뜨바, 라자스, 따마스의 속성을 가진다. 삿뜨바란 밝고 경쾌하고 즐거운 성질이다. 예컨대 신에 대한 찬가를 부를 때 떠오르는 즐거운 상념이 삿뜨바를 띨 것이다. 라자스는 역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고통스러운 성질이다. 따마스는 무겁고 어두운 성질이다.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세 속성 중 어느 속성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느냐로 결정된다. 어떻게? 쁘라끄리띠는 이러한 세 성질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뿌루샤가 쁘라끄리띠와 접촉하면 라자스가 동요하면서 세 속성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각축을 벌이게 되고,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몸이나 마음, 이성, 자아 의식 따위가 태어난다. 한 마디로 몸이나 마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 의식 즉 아항까라조차도 쁘라끄리띠의 일부인 것이다. 말했듯이 뿌루샤만이 불변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불변하는 뿌루샤의 참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뿌루샤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인 찟따를 정결하게 하고 동요치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이 바로 요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