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직조업 ==== 요는 건국 이전에도 자체적으로 직조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서 펠트나 가죽, 아마포를 생산했으나, 기술력은 뒤떨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란의 위정자들은 직조업을 장려하고 영토에 삼과 뽕나무를 심어 직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요의 직조업을 발전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한인과 발해인들을 흡수해서 그들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요는 한인, 발해인 포로들과 연운 16주의 한인들로부터 직조 기술을 습득해 직조업을 발전시키고 견직물을 생산했다. 한인들의 기술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발해는 예전부터 방직업 기술이 뛰어나고 특산물로 직물이 유명한 곳이 많았다.[* 요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세운 동란국에 공물로 아마포 10만 단을 요구한 것을 발해의 직조 기술이 높았던 증거로 보기도 한다.] 초창기에는 기술 수준이 떨어져서 거칠고 수수한 직물만 만들었지만, 점점 수준이 오르면서 거의 모든 종류의 견직물을 생산하고 직물도 섬세해져서 중국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송 진종은 건국 초에 받은 요의 직물과 성종에게 받은 직물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초기의 것은 거칠고 수수한 반면, 성종에게 받은 것은 섬세하다고 분석하고 연운 16주에 속한 유주에서 전부 생산한 것으로 판단했다.] 요에서 생산하는 비단은 능(綾) · 라(羅) · 기(綺) · 금(錦)의 4 종류가 있고 자수 기술을 비롯해 각종 문양과 무늬를 새기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요의 직조 기술과 도안, 문양은 당, 송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목축업이 번창함에 따라 그 부산물인 모직물과 가죽옷도 꽤 많이 생산했으며 그 기술력도 상당히 높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유행이 바뀌어 사람들이 두꺼운 비단인 금(錦) 대신에 얇은 비단인 라(羅)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는 중국의 유행을 따라해 금보다 라를 더 많이 생산했으며 라의 직조 기술도 상당히 높았다. 요에서 생산한 번라(蕃羅)는 요 · 송 무역에서 송의 상인들이 좋아하는 재화였고 그중에서도 품질이 우수한 견직물은 송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취급했다. 또한 호흠영의 요대 무덤에서 출토된 비단 유물들 중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직물들도 나왔으며 비단으로 무늬를 넣은 나문사직물(羅紋絲織物)은 송과 같은 수준이었다. [* 나문사직물 생산은 송대가 최고 수준이다.] 직조업과 더불어 직물에 염색을 하는 날염업도 함께 성장해서 요는 남경과 중경에 염원(染院)을 설치하고 사제점원사(使提點院事)를 두어 날염 공정을 관리했다. 요는 당대에 개발한 협힐(夾纈)과 납힐(蠟纈) 기술을 터득했고 요의 염색공들은 다양한 종류의 무늬와 도안을 염색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가장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은 연운 16주와 그 중심지인 남경이며 중경도와 동경도가 뒤를 따른다. 남경은 관영 직조업의 중심지이면서 요의 직조 기술 발전을 선도한 선진 지역으로 그곳에서 생산한 비단은 아름답고 수준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도종이 칙령을 내려 남경의 민간에서 사적으로 황제가 사용하는 비단을 직조하지 못하게 금지했던 것으로 보아 남경의 기술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정은 남경에서는 염 · 철세를 비단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용하여 비단을 추가로 확보하기도 했다.] 요 조정은 연운 16주의 뛰어난 직조 기술을 타 지역에 전파하기 위해서 16주의 한인들을 중경과 상경, 동경도 지역에 보내었다. 덕분에 3개 도의 직조업이 크게 발전하고 관영 공방은 물론 민간에서도 견직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물을 생산했다. 중경도의 경우, 중경도 영하(靈河 지금의 대릉하) 유역의 일부 주현이 뽕나무와 마를 재배하기 적합해 요 초에 황제들이 한인 포로 중에 방직에 능한 이들을 안치시켰다. 한인들이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직조업이 크게 성장했다. 특히 영하 유역에 위치한 홍정현과 백천주는 높은 품질의 명주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요 조정은 매번 북송으로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백천주에서 생산한 견백을 예물로 보냈다. 동경도는 발해 시기에 현주의 직물, 용주의 명주가 특산물로 유명하고 이 지역 외에도 발해 전역에서 비단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생산할 정도로 직조업이 발전했고 동란국 시기에는 마포 10만 단을 조공으로 바친 전력이 있어 연운 16주처럼 요의 지배를 받기 전부터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요 조정 또한 이러한 지역의 사정을 알고 있어 상경과 중경처럼 연운 16주의 한인 직공들을 정착시키고 양잠과 직조를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해 동경 일대의 직조업을 성장시켰다. 재밌는 점은 발해만과 요동 반도 일대에 살던 숙여진인들도 직조와 양잠 기술을 터득하고 있어서 각종 직물과 비단을 공물로 바치거나 상거래에 활용했다. 또한 요는 상경, 중경, 조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관영 견직물 공방인 능금원(綾衾院)을 설치하고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 직공들을 모아 황실에 쓸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중경도의 의주(요녕성 의현) · 천주(요녕성 표남) · 금주 · 패주(요녕성 조양)와 동경도 현주에 뽕나무와 마를 심어 능금원에 필요한 원료를 조달했다. 민간에서는 요의 주민들도 중국인들처럼 방직업을 부업으로 삼아 뽕나무를 키우고 질 좋은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이렇게 생산한 견직물을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경도의 일부 주민들 같은 경우에는 생사나 견직물만 납부하고 곡물은 납부하지 않아서 사잠호(絲蠶戶)라고 불렸다. 요 조정은 이런 식으로 징수한 견직물을 관료에게 하사하거나 외국에 선물로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