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불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요나라/mushin.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1.jpg|width=100%]]}}} || || [[불궁사]] [[목탑]]. 현존 최고(最高) 목탑이다.[* 다만, 완공은 [[금나라]]때 되었다고 한다.] || 요나라 시대 관음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2.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3.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4.jpg|width=100%]]}}} || ||<-3>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 화엄사의 요나라 시대 불상들. 화엄사의 요나라 불상들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 요는 원래 샤머니즘, 텐그리즘을 신앙하던 민족이나, 연맹 시절부터 중국과 교류한 영향으로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깊게 숭상했으며, 잡아온 한인 포로들 중에도 [[승려]]와 [[불자#s-1|불자]]들이 많아 한인을 중심으로도 불교가 성장했다.[* 발해인들도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어서 발해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902년에 개교사(開敎寺)를 세우고 신책 3년(918년)에 상경 임황부에 사찰을 건설하는 등, 불교를 후원했다. 같은 해, 요 태조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선정해 제사를 지내기로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처를 사당에 모시고 가장 먼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태자 야율배가 혼자 반대하고 공자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일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거란인 고위층들이 불교를 깊게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거란인을 비롯한 요의 유목민들은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를 믿을지라도 텐그리 신앙을 중요시했고 거란인 귀족들은 불교 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에도 정통한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종, 흥종, 도종인데, 성종의 거란어 이름은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온 문수노(文殊奴)이며 성종 자신은 불교 뿐만 아니라 도교 교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유학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요흥종|흥종]]과 [[요도종|도종]]도 신실한 불교 신자이면서[* 도종은 아예 산스크리트어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황제들이 호불 군주였던 점은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렇듯 초기에도 불교가 성장하고 있었으나, 요의 불교가 급격히 성장하게 된 시점은 연운 16주를 흡수하면서부터였다. 불교계는 황실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사찰 건립이나 불상 조영, 경전 판각 같은 사업을 진행하고 불사를 벌였다. 요 조정은 당제를 모방해 승관 제도를 만들어 승정, 승판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경전에 능한 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해 교리에 정통하고 자질이 뛰어난 승려들을 법사로 임명했다. 또한 5경 뿐만 아니라 각 주군에도 사찰을 설립하여 덕망 있는 승려들로 지역 승려들을 지도하게 하고 경전 연구, 암송, 참선 수행에 힘쓰게 했다. 이러한 조치는 불교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교리에 능하고 신앙심이 깊은 고승들의 수가 늘어나고 교학 연구도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조정은 불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허락 없이 사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손끝이나 이마를 불로 지지면서 기도하는 등의 행위를 금지했다. 요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불교 종파는 [[화엄종]](華嚴宗)이었다. 요의 서남부 국경에 위치한 산서 오대산(五台山)은 예전부터 화엄종의 중심지로 유명했으며 요대에는 국가 전체의 불교 중심지로 군림했다. 또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유명한 화엄 사상이 다민족 · 다문화 국가인 요의 성격에 잘 맞았던 것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민중들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는 정토종(淨土宗), 미륵불(彌勒佛)을 믿는 미륵 신앙을 가장 많이 믿었다. 그밖에도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密敎), 선종(禪宗)이 존재했으며 아미타불과 미륵불 외에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음보살(觀音菩薩)도 인기가 좋았다.[* 거란인의 민족 성산이며 텐그리 신앙의 중심지인 목엽산에 관음상을 세우고 민족 수호신으로 삼을 정도였다.] 그리고 성종의 이름이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온 문수노이고 상술한 오대산이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문수보살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다. 요는 선종 중심이었던 송과는 정반대로 당대 불교의 계승자로서 교종 중심적이었으며 선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또한 요의 불교는 동시기 고려와 마찬가지로 귀족적인 성향을 띠었다. 민간에서는 고려에서도 성행한 읍사(邑社)가 나타났다. 여러 지역에서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읍사를 조직해 각종 불사를 벌이고 사찰 건설, 중창, 불상 조영에 참여했으며 신자들은 이러한 활동에 금전이나 물자, 노동력을 제공했다. 다만, 모든 읍사가 이 모든 활동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어서 불상 조영에 치중하는 읍사, 사찰에 식량을 공급하는 읍사, 사찰 수리 및 불상 조영을 하는 읍사 등, 한 두 가지 목적만 정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읍사는 빈민 구제나 구휼과 같은 자선 활동도 벌였으며 읍사는 내부적으로 읍장, 읍정, 읍록 등의 직책을 두고 각종 업무를 맡겼다. 요대에 가장 성행한 읍사는 1천 명으로 구성된 '천인읍사(千人邑社)'이며 사찰에서 나서서 읍사를 조직하고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행사에 읍사를 참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읍사의 활동과 지원으로 불사가 더욱 성행하게 되고 신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통해 불교 신앙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사회적으로 불교계는 빈민 구제와 구휼, 기근과 홍수 같은 재해에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원조 같은 자선 사업과 불교 교리와 문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며 경제 항목에 상술했듯이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농경에 힘쓰고 지역 주민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요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한 선연(鮮演), [[인도]] 출신으로 국사가 된 자현, 대각국사 [[의천]]과 시를 주고 받은 지길 등이 있다.[* [[요도종|도종]] 역시 의천으로부터 [[원효]]의 저술을 받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54628|읽고]] [[대승기신론소]]를 극찬한 바 있다. 사실 의천은 요나라에서도 유명 인사라 도종의 국사로 추증되기도 하고 고려에 오는 요의 사신들이 의천을 만나고 싶어했다.] 이러한 유명 사찰의 승려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요 후기에는 이전보다 더 거대한 사찰과 불상의 건립, 대장경 간행이 이루어지고 유명 승려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불교가 발전했던 만큼 요는 수많은 탑을 세웠다. 특히 백탑(하얀 탑)을 많이 지었으며 현재까지도 14개이 탑들이 남아 있다. 요의 불탑 건축 문화는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훗날 [[금나라]]의 불교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의 광우사 백탑[* 요양(랴오양)에 있어 요양 백탑이라고도 부른다.] 역시 금나라 세종 때 지어진 요나라 양식의 백탑이라는 주장이 있다. 황실의 국찰인 [[산시성(산서성)|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 때 다시 중건하긴 했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 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 송의 대장경 출간에 맞대응해 요는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거란 대장경을 출간했고 이 대장경은 [[문종(고려)|문종]] 때부터 요나라 사신들을 통해 고려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에 심취한 요나라 황실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절에 시주했고 [[불교]] 관련 잦은 토목 공사가 끊이지 않아 재정 악화가 가속화한 점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 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사에는 [[요도종|도종]] 때 하루에 3000명이 출가한 기록이 있으며 36만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덕분에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이 쇠퇴하고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 조정에서는 불교계의 구휼과 자선 사업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요를 방문한 송의 사신,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인민을 착취했다고 한다.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였다. 후대에 [[원나라|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송, 요, 금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요는 불교 때문에 멸망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쿠빌라이 칸 본인부터가 [[티베트 불교|종파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였다.], 중국에서 이러한 평가를 오래도록 정설로 인식할 만큼 요대의 불교는 그 명암이 뚜렷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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