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주요 인물 == 요 조정에서 활동한 한인 관료로는 요 태조의 참모였던 [[강묵기]](康默記), [[조사온]](趙思溫),[* 조사온은 순흠황후와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순흠황후의 역공에 걸려 [[순장]]당할 뻔했다가 살아남은 인물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집에 날아온 운석에 맞아 죽었다.] 유성(劉晟), 요의 이한(二韓)이라 불린 [[한연휘]](韓延徽)와 한지고(韓知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잡혀온 한인 지식인과 억류당한 외교관들이었다. 그리고 항복한 한인 관료 출신으로는 요군에게 공성술을 가르친 노문진(盧文進), 전연의 맹을 중재한 [[왕계충]](王繼忠), 검소한 것으로 칭송받은 [[장검(요나라)|장검]](張儉) 등이 있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관료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한지고의 손자인 [[한덕양]]이다. [[한덕양]]은 [[예지황후]]와 부부관계였으며 성종 초기에 요의 국정을 총괄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예지황후는 한덕양(韓德讓)을 총애하여 국성을 하사하고 야율융운(耶律隆運)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은 물론, 황제와 태후의 직할령인 오르두를 만들 권리도 주었다. 심지어 황제인 성종까지도 그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할 정도로 한덕양의 권세는 무지막지했다. 황제가 태후의 재혼남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하는 것이 어이 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거란의 전통과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덕양은 살아생전엔 문충왕(文忠王)이란 관작을 받고 죽어서는 장례 규모가 예지황후와 버금갈 정도로 컸으며, 후대에 죄에 연루되어 관작이 깎이거나 부관참시당하는 일도 없어서 청대의 도르곤보다 더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한덕양은 내정면에서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는 평을 받을 만큼 일처리가 뛰어났으며, 의외로 군사적인 재능도 있어서 송의 북벌군이 남경을 포위하고 공성을 시도하는 것을 잘 막아낸 바 있다. 그러나 한덕양은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 인민들이 그를 싫어했고,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송이 2차 북벌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한덕양은 파벌을 조성해 권력 기반을 강화했는데, 이로 인해 붕당의 폐단이 발생해서 요 조정은 한덕양이 은퇴하고 나서도 한덕양파와 왕계충을 중심으로 하는 반 한덕양파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한덕추(韓德樞) · 실방(室昉) · 유신(劉伸) · 양길(楊佶) · 마인망(馬人望) · 대공정(大公鼎) 등의 한인 · 발해인 관료들은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가르치고 세금을 낮춰 인민들의 부담을 낮춰주었으며, 폐단을 없애고 분쟁을 조정해 명성이 높았다. 여기서 실방은 태종대에 과거에 급제해 태종, 세종, 목종, 경종, 성종의 5대를 섬긴 요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인망은 실무에 밝아 인민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공정하게 조세를 걷고 각종 공사와 민원을 빠르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말년에 금군의 공세를 막고 조정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바람에 세간의 조롱을 받는 신세가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한덕추, 대공정 등도 명신으로 활약했다. 강공필 · 시립애 · 양박 · 우중문 · 유언종 ·조의용 · 좌기궁 · 한기선 등은 요의 관료로서 금에 항복한 자들이다. 우중문은 문예로 유명하며 요 말에 과거에 급제한 양박(陽朴)은 발해 대족 출신으로서 교서랑까지 진급한 관료이다. 요군이 요동에서 대패를 거듭하여 금군이 밀고 들어오자, 양박은 금에 항복하여 금국에 종사했다. 능력이 출중하여 금 태조에게 여러 가지 헌책을 올리고 중용받았으며 요사보다는 금사에 더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다. 한기선은 한지고의 후손으로 금에 항복한 인사이다. 그 능력이 뛰어나고 강직하여 유능한 관료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수십 년 동안 고위 관료로 종사했다. 재밌는 점은 선조인 한지고는 요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후손인 한기선은 금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 양자 모두 양대 정복 왕조에서 중용받은 한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거란인 관료 중에는 야율달렬(耶律撻烈), 야율말지(耶律抹只), [[야율사진]](耶律斜軫), 야율학고(耶律學古), 야율해리(耶律海里), [[야율휴가]](耶律休哥), [[소달름|소달람]](蕭撻覽),[* 소달람은 소달름(蕭撻凜), 또는 소달람(蕭撻覽)이라 부르며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소달람을 채택한다.] [[소배압]](蕭排押), 소유자(蕭柳者), 소한가노(蕭韓家奴), 소효목(蕭孝穆)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모두 인민을 잘 다스리고 치국에 공헌해 명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도 있다. 야율휴가는 고량하에서 송의 북벌군을 대파한 명장으로 남경유수(南京留守)와 남면행영총관(南面行營摠管)을 겸임하면서 민 · 군정 양면에서 치적을 남겼다. 군정면에서는 수비군의 복무를 균등하게 배분해 교대로 휴식을 주고, 내정면에서는 농상을 장려하고 군수품을 잘 관리하는 등, 국경 지역을 잘 다스렸다. 야율말지는 개원군 절도사((開遠軍 節度使) 재임 중에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고, 소효목은 북원 추밀사(北院 樞密使)로 있으면서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요역을 균등하게 할 것을 진언해 조세를 이전보다 더 공평하게 조정했다. 소효목은 송과의 평화 유지를 유지하고 전연의 맹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송 · 요 양국 사이에서 벌어질 뻔한 전쟁을 막아냈다. 특히 소효목은 거란인이고 대연림(大延琳)이 세운 흥료국(興遼國)을 무너뜨린 장군 출신인데도 같은 거란계 강경파와 군부의 주전론에 반대했으니 식견이 높은 인물로 평할 수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연운 16주의 백성들이 전쟁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남북이 서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소한가노와 야율소 등은 동북과 서북 국경 지역을 안정시킬 방안을 제안하고 요역과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건의했다. 야율달렬은 남원대왕[* 김용의 무협지, 천룡팔부의 주인공 소봉이 요 도종으로부터 받은 그 직책이다.] 재직 중에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농사를 권장해 유목민들을 교화했으며, 인구를 늘리고 생계를 개선해서 인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야율해리는 주민 생계를 개선하고 지역을 관대하게 통치해 그가 재임한 뒤부터 인구가 늘어나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소달람도 서북로 초토사를 역임하면서 국경을 안정화하고 지역을 잘 다스려 이름이 높았으며 1004년 침공 때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황제의 기마 군단을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이끌었던 명장이었다. 그런 그가 정찰 중에 쇠뇌에 맞아 죽었을 때는 예지황후가 크게 통곡하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5일이나 조회를 파했으니[* 원래 대신이 죽었을 때는 조회를 3일 파하는데, 곽광과 같은 권신이나 뛰어난 명신들은 예외적으로 조회를 5일 파하기도 했다.] 소달람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문예로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는 요사 탁행전에 기록된 소차랄, 야율관노, 소포리불과 요사 문학전에 이름을 올린 왕정, 야율맹간 등이 있다. 여기서 왕정은 도종대에 활동한 사람으로서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시문과 정무에 능해 도종대의 제도와 법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야율을신이 총애하는 애첩과 인척 관계가 있고 야율을신이 죽인 소황후의 비행을 기록한 금초록을 작성해서 야율을신의 당파로 간주받았고 후에 을신이 주살당할 때에 좌천당했다. 야율맹간은 총명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야율을신의 전횡을 여러 번 간하다가 유배당했다. 유배 중에 태자 야율준이 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해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천조제 초기에 육원부 태보와 고주 관찰사를 지냈다. 육원부 태보 시절에 법령에 구애받지 않고 임의로 일을 처리해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맹간은 상고 시대에는 문서로 된 법령이 없었으나, 태평성대였고 법령을 이유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