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한국사에서의 위치 == 거란과 그들이 세운 요 왕조는 고대 예맥계 국가들과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초기의 거란인들은 그 세력이 약해 일부 부족이 고구려에 종속한 적도 있고, 거란의 중심 세력인 대하씨 연맹도 고구려와는 별다른 갈등을 빚지 않았다. 그러다, 고 - 당 전쟁을 계기로 대하씨 연맹이 당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와 충돌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영주 도독 조문홰(趙文翽)가 폭정을 일삼자, 대하씨 연맹은 봉기했다. 무주와 거란 연맹이 싸우는 틈을 타서 당의 통제에 놓여 있던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大祚榮)과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중심으로 결집해 요동으로 도주, 발해를 세웠다. 거란인들은 고구려를 공격한 적도 있지만, 세간의 평이나 나무위키의 여러 항목의 내용과 달리, 거란인들은 요련 연맹 시기까지도 발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발해가 크게 팽창하던 선왕(宣王)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거란 연맹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여 요 태조의 치세에는 태조 본인이 발해와는 대대로 원수였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발해 왕 대인선(大諲譔)과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시대에 발해 - 요 양국은 정말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고 서로의 영토를 침탈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요 왕조의 강력한 공세로 요양(遼陽)이 함락당하자, 발해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요양이 무너져 발해의 방어선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요양을 취한 요군은 이를 이용해 발해에 심한 방어 부담을 가중하고 다방면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26년, 요군은 부여부(扶餘府)를 급습해 빠르게 발해의 방어 병력을 무력화하고 상경성을 포위, 3일 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요 왕조는 지나치게 넓어진 국토, 요 태조의 급사, 황위 계승 분쟁, 발해 지방군의 반격, 부흥 세력의 강력한 저항 등의 문제로 인해 발해 고토 지역의 지배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요 왕조는 발해 고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서 동란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간접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음에도 [[발해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지 못했고 유민들이 결집하여 부흥 운동을 전개할 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발해의 후속 국가인 [[후발해]](後渤海), [[정안국]](定安國), [[올야국]](兀惹國) 등의 [[발해부흥운동]] 세력들이 발해 고토 지역을 중심으로 할거하고 발해인 장군 [[연파]](燕頗), 고욕(古欲)이 반란을 일으켜 부여부를 공격하고 상경 용천부에서 저항했다. 발해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은 숙여진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이 발해 고토 지역으로 흩어져 점차적으로 요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요는 발해 고토 지역의 [[발해유민]] 세력들을 제압하는데 애를 먹었고, 성종대에 와서야 겨우 발해 부흥 세력들을 거의 제압하고 지속적으로 국경을 침탈하던 생여진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