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고려와의 관계 === 고려의 경우, 나무위키의 관련 항목과 세평과는 달리, 건국 초에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궁예(弓裔)의 태봉(泰封) 정권 시기에는 요 왕조에 보검을 선물하고 2차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한 일이 있고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요 태조는 사절단을 보내 말과 낙타, 양탄자 등을 선물했다. 925년, 고려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나 발해는 형제국이라는 고려의 인식과는 별개로, 후백제(後百濟)와의 전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요양을 장악하고 발해에 공세를 취하는 요 왕조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양면 전선을 자초하는 자살 행위였기 때문에 고려는 현실적인 방안을 취했다. 심지어는 발해가 멸망한 직후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925 ~ 27년 동안 총 4회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다. 다만, 발해가 멸망한 뒤부터 고려 태조는 요 왕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점점 적대하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나와 결혼했다.", "발해는 친척의 나라다."는 표현을 후진의 외교관에게 말할 정도로 발해에 대해 우호적인 외교적 수사를 표현했고 [[발해유민]]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기류 변화를 느꼈는지, 요 왕조는 927년에 공산(空山) 전투에서 고려가 대패하자, 즉각 후백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 때 사절단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신라와 후백제 등은 요 왕조와 이전부터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 - 요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요 왕조에서 보내온 외교관들을 섬에 유배 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놓고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이다. 920년대에는 통일 전쟁의 부담 때문에 요 왕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했지만, 만부교 사건이 있던 942년에는 이미 통일을 이뤄 부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고려 태조는 대단히 강경하고 어찌 보면 외교적으로는 심각하게 무례한 일을 벌였다.[* 만부교 사건이 벌어질 당시 [[후진]]은 [[석경당]]이 죽고 뒤를 이은 [[석중귀]]가 거란과 적대했는데 고려도 후진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946년 석중귀가 거란애게 패해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에 후진과의 동맹 시도는 소득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고려와 요 왕조 간의 관계는 파탄이 나버렸고 3차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 침공은 원정군 총수인 [[소손녕]]이 [[서희]]와 교섭을 진행해 고려가 양국 사이에 놓인 [[강동6주]]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요조가 인정하는 대신, 고려는 사대 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으로 양국은 화평을 맺었다. 두번째는 요군이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분쇄하고 수도 [[개경]]까지 함락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흥화진(興化鎭)의 양규(楊規)에게 전쟁 기간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전쟁 목표인 고려의 항복, 강동 6주의 반환에 대해서는 달성하지 못해 고려 현종이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철군하여 실익이 없었다. 마지막은 [[강감찬]]에게 그야말로 [[귀주대첩|참패하고]] 만다. 여요전쟁 이후, 요는 고려와 화친하고 상호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일반적인 사대 관계로 전환했다. 덕분에 금 왕조가 탄생하기 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동북아시아는 송 - 요 - 고려 - 서하의 4개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벌어졌다. 1차 여요 전쟁 직후에는 고려 조정에서 [[거란어]] 학습을 지시하고 유학생들을 요에 파견하기도 했다. 종교면에서는 교류가 더욱 활발하여 불교 경전이나 이론 등의 유입이 잦았고 이때 수입한 요 왕조의 불경들은 훗날 [[팔만대장경]]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참고로 발해도 대장경을 만든 적도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요나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724919|#]]] 또한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은 송 · 요 양국에서도 인정받는 유명 인사였다. 요의 대군이 출하점(出河店)에서 대패하고, 1115년에 금 왕조가 개창해 요의 쇠퇴가 가시화되자, 고려는 1117년에 압록강변의 보주를 급습해 장악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금 왕조의 수뇌부들이 불편해 하긴 했으나, 요와의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고려와의 충돌을 피했다. [[대요수국]](후요)의 [[대요수국의 난|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고려로 침공해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농성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전반적으로 고려 - 요 왕조 간의 관계를 살펴 보자면, 양국 간의 관계가 극단을 달렸던 여 · 요 전쟁 이후부터 고려와 요 왕조는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어 서로 정기적으로 사신단을 파견하고 고려가 황제, 황후, 황태후의 생일 때마다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요 왕조와의 교류를 더욱 확대했으며 양국이 상호 간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의례도 체계화되었다. 이렇게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한 횟수는 200회가 넘고, 고려는 요 왕조와의 교류가 송 왕조보다 더 빈번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2회에 걸쳐 요군의 공세를 격퇴한 현종은 3차 전쟁 이후에 요 성종에게 신칭(臣稱)하고 왕자와 자신의 책봉을 청해 요 왕조로부터 정식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대요 사절단에 보내는 고려의 국서에는 국왕의 성씨와 이름을 그대로 서술했으며 연호도 요 왕조의 것을 사용하고, 국서에 고려 국왕이 스스로를 말할 때는 신(臣)이라 칭했다. 송 - 요 - 고려, 3국이 평화를 유지할 때는 고려가 요 왕조를 배려해 송조에 보내는 국서에 송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년도와 날짜만 써서 송조의 관료들이 격분해 고려 사절단이 곤욕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2차 여 · 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고려는 요 왕조에 여러 차례 국서를 전달하며 저자세를 보였으나, 이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였을 뿐, 내부적으로는 병력을 증강하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전쟁에서 승전한 뒤에는 퇴각하는 성종에게 사신을 보내 회군에 감사를 표명하고 요를 상국으로 대하며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성종의 입조 요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3차 여 · 요 전쟁에서 승전했을 때에는 이전처럼 회군에 감사를 표명하지 않고, 요 왕조가 먼저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 화친을 칭할 때까지 기다리며 여유를 부리는 등, 고자세를 취하며 요조에서 먼저 화친을 칭하게 만들었다. 이에 양국 간의 관계 회복 필요성을 절감한 요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오자, 고려는 그제서야 사신을 보내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의사를 밝히고 상호 간의 평화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써 고려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숙원이던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완전하게 확보했고, 요 왕조로서는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서를 살펴 보면, 고려가 요 왕조에 대해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고려가 사대 관계를 맺은 것이 이상해 보일 수는 있으나, 고려는 승전했음에도 2차 여 · 요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양규와 김숙흥(金叔興)이 후방을 헤집고 서경이 굳건히 버텼지만, 수도 개경과 경기도 일대는 초토화되고 국왕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반대로 패전국인 요 왕조는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국으로 군림했다. 그 송 왕조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군사 강국인 요 왕조는 건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 왕조와의 장기적인 적대 관계는 고려에게 좋지 못했고, 조공 - 책봉 관계를 수립하고 강동 6주의 영유권과 장기적인 평화를 확보하는 게 국익에 부합했다. 그래서 고려는 실리를 따져 요 왕조와 사대 관계를 수립하는 대가로 평화와 강동 6주를 보장받았다. 이후, 고려는 상호 공존과 인정에 기반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장기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했으며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거의 완전하게 인정받았다. 요 왕조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고, 고려는 송 · 요 양대 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실리를 추구했다. 요 왕조의 책봉을 받고 정상적인 사대 관계를 수립한 상황에서, 고려 국왕은 요조의 사신이 왔을 때에 북면하지 않고 서면하는 예법을 취했으며 송 왕조로부터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 이익을 얻어내고 문화적 혜택을 받았다. 이는 고려가 송 · 요와 같은 대국들과 사대 관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국익을 추구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요 왕조가 동 여진을 치기 위해 고려에 통행권을 요청했을 때는 통행권 허용을 거부하거나, 요 왕조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부족장의 직첩과 관인을 임의로 회수하고 고려의 관직을 내린 사례, 국경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자는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하고 민간 무역을 통제한 사례들을 보면, 고려의 외교 노선이 장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려는 철저하게 국익과 현실에 부합하는 외교 정책을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호 대등한 관계도 굴종하는 속국 관계도 아닌, 대국을 상국으로 인정하고 받들어 주면서 실리를 추구하고 때로는 상국을 상대로 결연한 태도를 보이는 등, 상호 공존하는 정상적인 사대 - 조공 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고려의 사대 관계는 외재적인 면이 강하고, 예와 의로서 상국을 존중하는 내재적인 면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는 명 · 청이라는 강력한 통일 왕조를 상대로 해야 했던 조선과는 또 다른 형식의 사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