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요나라 (문단 편집) === 전성기 === 발해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태조가 급사하자, 요 왕조는 정치 노선과 황위 계승 문제, 황권 도전 세력에 대한 진압 문제를 놓고 태자 야율배(耶律倍)와 황자 야율덕광(耶律德光) 사이의 계승 분쟁이 터졌다.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한인 관료들과 친하고 학문이 뛰어난 야율배보다는 군무에 관심이 많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야율덕광이 황제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순흠황후(淳欽皇后)는 당시 동란왕(東丹王)으로 발해 지역을 통치하던 야율배 대신에 야율덕광을 옹립했다. 그리고 황권에 반발할 가능성이 큰 보수 세력, 야율덕광의 계승과 자신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는 선황의 측근, 동란왕 지지 세력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와 지휘관들이 주살당하고, 야율배의 견제를 위해 동란국의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 독이 되어 점차 발해 고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발해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발해 통치 문제로 고심하던 태종은 상경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요서로 이주시킨다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뿌리 뽑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태종은 발해 고토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다 포기해야 했다. 요는 성종대가 되어서야 요동의 발해 고토를 일부 장악하고 동만주와 북만주, 함경도 일대 여진족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는 멸망하는 그 날까지 발해 고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동란국이 건재하던 시점에도 [[발해유민]]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아 수 차례에 걸쳐 발해 저항 세력들을 철권으로 찍어 누르고 통치력을 재확인해야 했지만, 동란국을 매개로 발해 고토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발해인들을 포섭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태조 사후의 황위 계승 분쟁과 태종의 섣부른 요동 포기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보기가 황태자 야율배를 동란국왕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거란 – 발해 동군 연합 정권을 구성하려 한 시도였다고 파악하는 학설도 있다.] 골육상쟁을 벌이긴 했지만, [[태종(요)|요태종]]은 황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며 관제를 정비해 남 · 북면관제를 실시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그는 인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국력을 신장시켜 가던 중, 936년(후당 청태(淸泰) 3년, 요 태종 천현(天顯) 11년)에 [[후당]]의 [[이종가]](李從珂)와 내전을 벌이고 있던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이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燕雲 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인근의 중국 동북부 지방)와 30만 필의 세폐를 대가로 내어줄 테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군대를 일으켜 [[후당]]의 [[이종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석경당을 용상에 앉혔다. 원군 요청은 요 태종에게 영토와 돈은 물론이고 복수도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였는데, 이종가(李從珂)가 자신의 형인 야율배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일석이조였다. 황위 계승 투쟁에서 패배해 후당으로 망명한 야율배였지만, 그래도 조국에 대한 애착은 남아 있어 동생인 요 태종과 내응하여 요군의 침공을 도왔다. 다시 조국의 품으로 귀환하면 되는 찰나에 이종가가 같이 현무루(玄武樓)로 올라가 자살하자는 것을 거부했다가 주살당했다.] 석경당에게 받은 연운 16주의 경제력과 세폐를 이용해 국가를 발전시키던 요 태종은 [[석경당]]의 뒤를 이은 [[석중귀]]가 세폐를 거부하고 적대적으로 돌변하자, 진노하여 친정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키고 [[카이펑시|개봉]]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들의 약탈, 강간, 살인을 용인하는 잘못된 점령지 정책 때문에 한인들이 저항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가해와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연운 16주로 퇴각했다. 요군이 자행한 학살과 파괴는 도를 넘는 것이었다. 태종은 한인을 사로잡으면 얼굴에 자형(刺刑)을 가해 살려준다는 글자를 새긴 다음에 풀어주고, 그의 사촌 동생인 마답(摩遝)은 더 잔인해서 한인을 붙잡으면 얼굴 가죽을 벗긴 뒤에 눈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답은 죽인 한인의 손과 발을 잘라다 집에 장신구처럼 걸어두었다. 또한 요군은 행군 중에 보이는 집은 모조리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강제로 끌고 온 주변 백성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어 죽게 했다.[*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018년 5월 출간/ 97~98쪽.]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패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연운 16주 이남의 일부 영토들도 얼마 못 가서 상실했다.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산서에서 자립한 [[유지원]](劉知遠)이 어부지리를 얻어 개봉에 입성하고 [[후한]](後漢)을 건국했다. 7년 뒤, 요는 [[후주]](後周) [[곽위]](郭威)와 후한 잔존 세력 간의 분쟁에 개입해 [[후한]]의 계승자인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北漢)을 위성국으로 삼는 것으로 손실을 조금이나마 메꿀 수 있었다. [[자치통감]]에는 요 태종이 연운 16주로 퇴각할 때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고 탄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원문: 我不知中國之人難制如此! 한글 음 : 아부지 중국지인 난제여차! 출처 : 자치통감 286권. 후한기 1. 실제로 학사 장려(張呂)가 태종이 지적한 자신의 잘못들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헌책을 올렸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요사에서는 태종이 여양도(黎陽道)를 지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리고 태종은 황태자에게 전황을 얘기하면서 해결책도 함께 제시했다. >'''"하동(河東)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서로(西路)의 추장들도 서로 무리지어 어디로 귀부할까를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백관의 마음을 구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 가지 방법뿐이다."''' 이를 통해 [[태종(요)|요 태종]]이 개봉에서 돌아오면서 중국의 정치와 문화 전반을 파악하고 한인에 대한 통치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요는 이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정주민들에 대한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체제를 정비하기도 전에 태종이 급사하여 요의 정계는 긴장 상태에 빠졌다.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동란왕 야율배는 오래도록 거란 귀족들의 동정을 받았고 정계에서는 동란왕 지지 세력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순흠황후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이 상황에서 태종이 급사하고 본토에서 순흠황후가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요의 귀족과 관료들은 19년 전에 태조가 붕어하고 수백명의 귀족과 관료, 장군들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떠올렸다. 순흠황후가 황태후의 이름으로 대규모 숙청을 벌이고 3대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관료와 지휘관 다수, 동란왕 지지파의 잔존 세력, 가족들이 숙청당해 순흠황후에게 원한이 있는 귀족들이 힘을 합쳐 세종의 자손인 영강왕(永康王) 야율완(耶律阮)을 옹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흠황후는 막내 아들인 야율이호(耶律李胡)와 함께 거병해 맞섰다. 그러나, 이호는 형들과 달리 역량이 떨어지고 잔인무도해 인망이 없었던 데다가 순흠황후 역시 군부와 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내전에서 패배하고 아보기의 능묘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된다.[* 시일이 흐른 뒤, 조모를 유폐한 것에 문제 의식을 느낀 관료들이 간언하자, 세종은 순흠황후를 풀어준다.] 할머니를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세종(世宗)은 정력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여러 가지 개혁과 체제 정비를 단행했다. 그러나, 오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별 소득을 못 본 데다가 한화와 중앙집권화, 황권 강화 정책을 밀어붙여 보수파들의 커다란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세종은 상고산(祥古山)에서 제의를 진행하던 중, 태조의 조카인 야율찰할(耶律察割)과 야율분도(耶律盆都)에게 암살당했다. 이들의 반란은 이전부터 양자의 불온함을 감지하고 있던 척은(惕隱) 야율옥질(耶律屋質)이 급히 군사를 몰아오고 태종의 장남인 수안왕(壽安王) 야율경(耶律璟)이 합세해 진압했다. 수안왕은 각 부와 왕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으나, 그는 지나치게 잔혹하여 원한만 쌓고 성급하게 황권 강화를 밀어붙여 반대 세력만 불렸다. 결국, 목종(穆宗)은 반대파들의 결집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냥하던 중에 암살당하고 만다. 세종, 목종의 연이은 피살로 인해 요는 내부적으로 반란과 사회 혼란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후주(後周)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등 내우외환에 빠졌다. 요 왕조는 954년(후주 세종 현덕(顯德) 원년, 요 목종 응력(應曆) 4년)에 북한(北漢)을 침공한 후주(後周)를 격퇴하고 호기롭게 역공을 걸었다가 고평(高平)에서 장령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대패했다. 이후, 959년(후주 현덕 6년, 요 응력 10년)에는 [[세종(후주)|후주 세종 시영(柴榮)]]이 공세를 가해와 연운 16주 중에 두 곳인 막주(莫州)와 영주(瀛州)를 빼앗았다. 오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송]]은 국초에는 요에 우호적이었지만, [[태종(송)|태종]]대부터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2차에 걸친 북벌을 단행했다. 979년(송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요 경종 보령(保寧) 11년)에 송(宋)의 침공을 받은 북한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한 요는 백마령(白馬嶺. 지금의 산서성 양천시)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력과 지휘관을 잃는 건국 이래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기세가 오른 송의 1차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연운 16주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남경까지 포위하는데 이른다. 이에 맞서 요는 침착하게 보급로 차단과 유인 전술을 사용해 송군을 지치게 만드는 한편, 주력군으로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심지어 고량하 전투(高梁河 戰鬪) 때는 수만의 송군을 익사시키고 목을 베었으며 총수인 태종(太宗)이 당나귀가 끄는 마차에 타고 도망치게 만들 정도의 굴욕적인 참패를 안겼다. 송의 1차 북벌을 막아낸 요는 송의 군사력 약화를 노려 980 ~ 982년에 걸쳐 송을 침공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7년 뒤, 986년(송 태종 옹희(雍熙) 3년, 요 성종 통화(統和) 4년)에 송 태종은 2차 북벌을 개시했다. 2차 북벌은 1차 북벌보다 여건이 더 좋았다. 당시의 요는 [[한덕양]](韓德讓)이 권세를 휘둘러 민심이 동요하고 황제(성종)의 나이가 어려 [[예지황후]](睿智皇后)가 수렴청정하는 상황이었다.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태종은 성종이 봄 순행을 위해 북쪽으로 떠난 틈을 노려 3월에 대군을 동원하고 3로로 진격해 들어갔다. 송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오자, 요 조정은 송이 자국의 내부 사정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단 사실에 크게 당황했으며 북벌군의 규모에 기겁했다. 이에 예지황후가 나서서 공황 상태에 빠진 조정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병력을 모아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1차 북벌과 마찬가지로 초반에 승승장구하던 송군은 연운 16주의 핵심인 남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요군의 지연전과 보급로 차단, 각개격파 전술에 휘말리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송으로서는 뼈아픈 것이 2차에 걸친 북벌로 통일 전쟁을 수행한 고참병들과 양계업(楊繼業)을[* 양계업의 재능을 아까워한 성종과 요의 수뇌부들이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계업은 이를 거부하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죽었다.]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해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은 위축되고 역으로 요가 기세를 타고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999년부터 요군은 3차례의 침공을 가해 송의 방어 거점들을 무너뜨리고 포로와 물자를 일방적으로 약탈해갔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성종은 1004년에 친정을 결심하고 [[예지황후]]와 함께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성종이 이끄는 요군은 하북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고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진격했으나, 원수 [[소달름|소달람]](蕭達覽)이 전사하고 송 진종 또한 친정을 나와 송군의 사기가 오르는 바람에 도리어 위기에 빠졌다. 전세가 반전된 것을 느낀 성종은 안전한 퇴각과 원정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진종]]과 [[전연의 맹]]을 맺고 물러났다.[* 이렇게 평화 협정을 맺긴 했지만, 송은 워낙 요를 얄미워해서 북송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전]] 등에는 원래 없던 요나라와 맞서는 부분이 추가되기도 했다.] [[정복왕조]] 개념을 제시한 [[독일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이 시기 거란과 송의 군사력을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 못하였던 세력 균형의 적대관계'로 묘사했다. 전연의 맹을 맺음으로써 중국 정복의 꿈은 완전히 버렸지만, 요는 송이 보내주는 막대한 세폐를 국가 발전에 투자하고 영토를 확장해서 동으로는 [[요동]], 북으로는 [[바이칼 호]], 서로는 [[천산 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그래서 요는 의외로 중앙아시아에서도 꽤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뒤에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또한 성종은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이 시기의 요는 경제와 무역이 크게 성장해서 번영을 누렸다. 또한 전연의 맹은 외교적, 명분론적인 성과도 컸다. 기존까지 요는 중국 왕조로부터 ‘이민족’ 취급받았지만, 이제부터는 ‘북조(北朝)’로서 ‘남조(南朝)’인 송과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 왕조는 [[거란족]]과 [[한족]]을 대상으로 인속이치(因俗而治)라 부르는 이중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유목 민족의 땅은 유목민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연운 16주]]와 발해의 고토는 주현제를 적용해서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제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주민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중 통치 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송사전 요 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요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나 [[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과 [[사모]]를 입은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jpg]]] 어찌보면 이런 점에선 [[청나라]]보다 관대했던 셈. 물론 청과 달리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로 멸망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지도를 비교해 봐도 요의 영토에서 정주민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고, 중국 전역을 정복한 청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만약 청이 요처럼 1국 2체제로 유목민과 정주민을 나누어 통치하려 들었다면 정주민 영역의 비중이 너무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 따라서 요가 한인과 거란인(유목민)을 분리하여 거란인의 한화를 막는 것만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데 비해 청은 단순히 만주인의 한화를 막는 것뿐 아니라 가능한 한인을 만주화 시키기까지 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종적으로 요는 최초의 [[정복왕조]]로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목민과 정주민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창조해 후대의 정복 왕조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이것은 요 왕조가 이룬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