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병 (문단 편집) === 중세 후기 === || [youtube(7eEtyfewXmE)] || || [[토크멘터리 전쟁사]] [[https://www.youtube.com/watch?v=7eEtyfewXmE|95회 전쟁의 패러다임에 변화를 준 용병2]] || [[르네상스]]기로 들어가면 [[신성 로마 제국]]([[독일]])의 [[란츠크네히트]]처럼 국가에서 관리하는 용병대도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는 [[프랑스 왕국]]에서 [[국가 헌병대]]를 뜻하는 [[장다름]]은 원래 [[프랑스 국왕]]이 고용한 용병이었다고 하며, 또한 [[동로마 제국]]은 신체 강건한 [[노르만]] 출신 용병들을 [[근위대]]로도 활용하였는데 그게 바로 [[바랑기안 가드|바랑기안 근위대]]이다. 바랑기안 근위대는 높은 충성도로 명성이 높았는데,[* [[안나 콤니니|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에 따르면, 바랑기안 근위대는 제국 토착 엘리트 병사들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충성심과 용맹함을 가지고 있으며, 황제 수호가 대대로 물려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회유하기 몹시 어려우니 일찌감찌 그런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알렉시오스 1세]]는 옆 성벽에 있던 독일 용병을 회유하여 간단히 수도에 입성해서 [[니키포로스 3세]]를 축출하고는 제위에 올랐다.][* 이는 대부분의 용병이 외국 출신이기에 해당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대적으로 무관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현대와 같은 세련된 행정기술을 가진 것도 아닌 근대 이전, 국내에서 징병된 군대는 이렇게 저렇게 국내의 정치적 유력세력과 연줄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고, 각 부대의 지휘권 역시 이러한 연줄에서 자유롭기 힘들었다. 따라서 정치적 대립 상황이 발생할 경우 토착 병력들은 그 갈등 구조에서 한쪽 편을 들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던 것. 하지만 외국 출신 용병은 해당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에 고용주(왕이나 황제)에게만 충성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1204년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의 이탈리아에서도 '''콘도티에로'''(Condottiero)라는 계약직 용병대가 성행했는데 젊은 나이에 용병대장이 된 후에 [[밀라노 공국|밀라노]] [[공작(작위)|공작]]까지 오르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은 주로 용병들에 의해 치러진 탓에 일부러 용병들이 짜고 나라 간의 분쟁을 일으켜 '''싸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쌍방 피해 없이 보수만 타 먹는 일도 많았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고용한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가 이런 짓을 많이 벌였다고하며 그 밖에도 예전부터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인 등등도 이탈리아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벌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정이 [[프리랜서]](용병단)가 활약할 만한 환경을 조성했다. 15~16세기 유럽 대부분의 전쟁터는 프리랜서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애국심이나 승리에 대한 열정 따위는 10원어치도 없는 이 프리랜서들의 전쟁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누가 빨리 기동해서 주요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느냐에 달렸으며 시일만 질질 끌다가 퇴각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돼도 양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전면전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제한전(limited war)의 성격이 강했다.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22810122500401|프리랜서는 왜 '용병'이라고 부를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용병단이 붙은 전투에서 서로 칼을 두어 번 휘두른 뒤 평원에서 쉰 후 보수로 서로 함께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쓰는 것이 최악, 동맹군은 악, 그리고 오직 국민병만이 최선.", "용병 대장은 유능할 경우 왕의 지위가 위험하며, 무능할 경우 왕의 돈이 아까우므로 결국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용병이란 군체계가 그야말로 최악의 체계이며, 개념 박힌 국가라면 절대 피해야 할 군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군주론]] 12장 참조.] 마키아벨리가 용병들의 먹튀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반만 맞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마키아벨리가 대안으로 내놓은 시민군은 용병보다 잘 싸우기는 커녕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당시의 시민병은 전투 경험이나 전문성 면에서도 용병들보다 떨어지며 열세에 있었지만, 그보다도 시민병은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더욱 불리했다. 몇 십 km 떨어진 곳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전쟁을 치른다고 하면 농민이건 상인이건 생계가 곤란해지고[* 때문에 용병이 아닌 시민병들이 반란을 일으켜는 경우도 꽤 많았다.], 이는 곧 세수의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나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시민은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게 전쟁을 더 오래 수행할 수 있고 국가 내적인 피해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다보니 각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장기화되고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병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로마 제국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하기 오래전인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 시대에 시민병은 사실상 도태되기 시작했다. 물론 징집된 시민병의 개념을 넘어선 상비군 시스템을 사용한다면 저런 문제는 극복되나, 당시의 국가들의 재정이 상비군 시스템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용병이 결국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저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전장에서 용병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격렬한 용병 혐오는 그의 주된 관심사가 당시 [[이탈리아]] '''내부'''의 정세와 조국인 [[피렌체]]의 이익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과 같은 '''대국'''들은 일개 용병단 수준에서는 어떻게 덤벼볼 엄두도 나지 않는 강력한 슈퍼 갑이었고, 따라서 이들에게 고용된 용병들은 충실하게 계약의 신의를 지켜 그 대가를 받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도시국가 수준의 소국들이 할거하던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소국의 군주(영주)가 직접 용병대장으로 나서는 일도 드물지 않았고, 따라서 고용주와 피고용 용병단의 세력 차이가 그리 크지도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던 것. 따라서, 용병이 불성실하게 굴더라도 고용주측이 그대로 때려 조지고 응징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 첫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는, 용병단 수준으로는 끼어들 엄두도 낼 수 없는 대국들의 파워게임과는 달리 이탈리아 내부 갈등에서는 용병단 역시 그 정치적 위상에서 고용주측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정세의 주요 구성요소들이었다는 점이다. 소국과 소국이 싸우는데 고용된 용병대장 역시 그 못지 않은 소국의 군주라면, 고용주의 입장보다는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는 게 나에게 유리한가'를 먼저 따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용병 관련 일화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피사 원정의 경우, 용병을 고용하여 여러 차례 시도했음에도 번번히 실패했던 피사 원정이 마키아벨리가 제안한 시민군을 동원하여 시도하자 단번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전투력이 떨어지는 시민군으로도 단번에 성공할 수 있던 피사 원정이 이전까지 번번히 실패했던 것은, 피렌체나 피사와 나름 대등하게 영향력을 겨룰 수 있는 정치적 단위인 용병대의 입장에서 내륙 도시인 피렌체가 대규모 항구도시인 피사를 완전히 장악하여 세력을 크게 키우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태만하게 전투에 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상당한 합리성이 있는 것. 물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피사는 피렌체에서 수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 도시이기에 당시의 행정/교통통신 기술 한계에서도 시민군의 원정이 가능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소국중에서는 그나마 세력 규모가 큰 편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용병을 고용할 때 대규모 용병단이 아니라 소규모 랜스 단위로 고용하고 관료들이 그때그때 지휘관에게 병력을 배정해주는 방식을 사용했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군사적 효율성만을 생각하면 평소부터 손발을 맞춰오던 대규모 용병단을 통째로 고용하여, 평소부터 익숙한 지휘관에게 지휘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효율성을 포기하더라도 용병단이 독자적인 입장을 가지는 정치적 실체가 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 결국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서 제대로 된 대규모 국민군을 편성하여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반박에 대해서는 재반론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으나, 어쨌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피렌체'의 공무원이 내놓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행동방침으로 해석해야지,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대국의 사례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 또한 저런 지뢰(?) 용병단의 반대 급부로 독일의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의 유명한 [[스위스 용병]]대는 충성심과 신용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이들이 충성심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반대로 충성심과 신용도가 떨어지는 용병도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대에도 물건 조사 제대로 안 했다가 지뢰 밟는 것과 특별히 차이가 없는 것이다.~~용병들도 사람이야 사람!~~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스페인 정규군이 임금 체불과 보급 악화로 인해 반란 직전까지 몰렸을 때도 용병들은 돈은 잘 받고 있으니 별다른 불평 없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는 용병에 의한 정치 불안을 겪지 않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교황 등이 연합한 캉브레 동맹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이탈리아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관료들이 경험을 통해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대규모의 용병을 거느린 용병대장과 계약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단위인 '랜스(lance)'별로[* 창기병 한 명마다 여러 수행원과 보조원이 붙었기 때문에 정규 랜스 하나면 6명 정도로 이뤄진 기병 분대가 구성되었다.] 각각 직접 계약을 체결했고, 용병대장은 자기가 직접 거느린 병력이 아니라 관료들이 그때 그때 배정해 준 '랜스'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이러한 자유계약 용병을 지칭하는 단어가 오늘날에 와서는 계약직 노동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프리랜서]](freelancer)이다.] 또한 관료들은 전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을 계획-관리했으며, 각 랜스와의 계약을 장기화함으로써 고용주인 베네치아에 일체감과 충성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또한 정기적으로 점호와 사열을 통해 각 랜스가 계약한 대로의 인원과 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는 그 후의 국가들이 관료체계를 통해 정규군을 운영하는 방식의 모범이 되었다. 대국이 용병대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강조한 '징집된 민병'이 용병들에게 처참히 발리는 바람에 피렌체도 결국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스위스 용병]]대나 란츠크네히트의 위명도 점차 사라져갔지만, 유럽 대륙에서 용병이라는 개념 자체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멀쩡하게 건재하고 있었다.''' 당장 17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전쟁인 [[30년 전쟁]]만 봐도, 이 전쟁 자체가 '''근대적 국민 국가의 성립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르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서 마우리츠 공의 휘하에 용병으로 있었다.] 당연히 이 시기의 전쟁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국민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까지도 대다수의 군대는 순수하게 소득을 찾아 참전한 용병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 동맹군들의 경우 용병에 의존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으며, 이 용병들은 마키아벨리의 편견과 같은 허당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무시무시하게 잘 싸웠다. 사실 이 때야말로 유럽 용병의 전성기로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다.[* 입지전적인 용병이라면 단연 발렌슈타인이 꼽힌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사생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친부터가 당대의 유명한 용병대장이었고, 그 영향력으로 어린 시절에 나폴리에서 후작 작위까지 인정받았다. 그가 밀라노 공작이 된 것도 전임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한 틈을 노린 공화국을 밀어버린 결과였다. 이에 비해서 용병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급귀족으로 시작한 발렌슈타인은 운 좋게 부유한 과부와 결혼해서 돈을 번 이후로는 바닥부터 용병대를 조직하고 황제와 딜을 하고, 당대 최강국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용병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한테만 충성을 바쳤고, 보상도 돈이 아니라 영지와 지위로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식 직함은 용병대장 '''따위'''가 아니라 제국군 대원수 겸 프리드란트 공작 겸 메클렌부르크 공작이였다. 사비를 털어서 황제의 재정 지원을 거의 안 받으면서 활동한 발렌슈타인의 모습은 자신의 주군과 이권을 위하여 싸우는 '''제후'''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동시대 사람들은 발렌슈타인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이자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봤지 용병으로 보진 않았다. 이 사람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함께 17세기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인물로 거론되는 수준이다.] 심지어는 국민병 제도의 근간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마저도 국민병 못지않게 용병을 많이 사용했을 정도로, 이 시기까지도 용병은 사실상 유럽 각국 군의 중추였다. 주로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유럽 각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스코틀랜드의 경우 전체 스코틀랜드 남성의 15%인 약 4만 명 가량이 30년 전쟁 기간 동안 용병 노릇을 했다. 30년 전쟁 때 종군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전쟁 말기 본국의 상황이 [[찰스 1세]]와 급진 개신교 세력의 갈등으로 엉망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와 결국 언약도 혁명과 [[잉글랜드 내전]] 때 의회파가 본격적으로 [[크롬웰]]의 지휘 아래 신모범군을 창설할 때까지 그나마 영국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장병들로 맹활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