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병 (문단 편집) === 근대 === 17세기가 지나고 18세기가 되어서까지도 용병은 유럽의 군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이전 세기의 발렌슈타인처럼 유력한 귀족 한둘이 용병대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어졌고, 중앙정부가 군사 업무에 관한 권한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군대의 성질을 국민군으로 바꿔놓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교적 민족 의식이 강했던 프랑스를 봐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경우 전체 보병 연대의 무려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도 민족적 정체성이 약했던 독일의 영방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보다도 더 심했다. 사실 민족주의 자체가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했던 기존 기득 세력을 엿먹였다고 봐도 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주장은 용병들에게 민족주의가 심리적인 타격[* 타 민족을 도왔다가 토사구팽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입힌 후에야 현실[* 무조건 중립 포지션이라 그러한 타격이 적은 스위스 용병 같은 경우는 여전히 잘 싸웠다.]이 되었다. 또한 근대 용병집단들 중 특기할 만한 곳이 있으니, 독일의 헤센카셀 방백국이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지지자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 1세]]는 1567년 죽으면서 네 아들들에게 헤센을 분할 상속해 헤센 방백국이 넷으로 갈라졌다. 이 중 차남의 마르부르크와 3남의 라인펠스는 헤셀카셀로 합쳐져 최종적으로는 헤센카셀 방백국과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만 살아남았다. 용병업은 헤센카셀 방백국의 이야기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과 그 후신인 [[헤센 대공국]]과는 무관하다.] 헤센카셀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소규모 영방국가 중 하나였는데,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용병업을 국책사업으로 삼았다. 본래 농업국가였는데, [[30년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워지고 활용할 자원이 인력뿐이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 즉 전격 현실판 '''용병 국가.''' 헤센카셀은 고작해야 도시 한두 개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연방국가였지만 대대적인 징집으로 전 국민의 무려 7% 정도를 계속 군인으로 유지했으며 이를 유럽 각국의 여러 영주들에게 용병으로 대여해주며 외교적 안정과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7년 전쟁]] 때는 또 국토가 초토화되었는데, 이 여파로 군국주의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7년 전쟁 이후에는 일반 병사들도 장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급료는 꽤 많이 받았고[* 헤센 병사는 한 달 급료로 소 한 마리나 돼지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반적인 농민의 수입보다 훨씬 많았다.[[https://www.historynet.com/hessians-the-best-armies-money-could-buy.htm|출처]] 하지만 지원병이 아니라 무려 24년의 징병제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미국에 간 헤센인 중 상당수는 농지와 시민권을 준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미국에 정착했다.] 복무하면 가족들의 세금은 면제되었지만, 문제는 세금을 못 내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고 기간이 무려 24년이었다는 점이다. 징병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다.[* 250 탈러 이상 재산 보유자 및 기술자 등 필수직은 면제.] 약탈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약탈을 할 수 있으면 했으며 특히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약탈로 악명이 높았다. 또 헤센 카셀은 신교도 국가에만 고용된다는 원칙이 있었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할 때만 예외였다. 헤센군이 유명해진 것은 당대의 강국인 영국과 자주 계약을 하면서 바로 그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기 때문인데, 이때문에 미국에서 헤센인은 용병과 동의어로 쓰였다. 미국 독립전쟁에는 다른 지역 독일 병사들도 참전했는데 헤센 출신들이 숫자가 다수고, 유명하다 보니 그냥 통칭해서 헤센인이라 불렸다.[* [[슬리피 할로우]]에 나오는 목 없는 기사의 정체와 [[어새신 크리드 3]]에서 나오는 양측 특수병인 헤센 병사가 바로 이들이다. 물론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미국측이 공식적으로 헤센병 부대를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 미국의 차고 넘치는 빈 땅을 준다고 꼬드겨 탈영과 해산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미 대륙의회에서는 헤센 병사들이 미군 쪽으로 전향하는 대가로 50 에이커의 토지와 시민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미국 독립전쟁 이후로도 헤센카셀은 여전히 용병업을 계속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에도 참전했고, 1798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도 영국편으로 참전했다. 헤센카셀이 용병업을 그만둔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헤센카셀을 점령한 뒤의 일이다. 이후 헤센카셀은 선제후국이 되었지만 빌헬름 9세[* 헤센카셀 방백국의 영주로는 빌헬름 9세지만 헤센카셀이 헤센 선제후국이 된 뒤로는 빌헬름 1세(초대)이다.]가 쫓겨나고 베스트팔렌 왕국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빌헬름 1세도 복귀했지만 용병업은 그만두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각국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바람과 함께 이러한 국가 용병 군대의 입지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용병은 유럽의 군사 제도 속에서 주목할 만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도 영국군은 군 내부에 독일인 병사들로 이루어진 KGL(King's German Legion)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종의 기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도 회사군은 아예 영국 정규군의 명령 체계를 따르지 않는 [[사병|사설 군대]]였다. 또한 프랑스도 [[프랑스 외인부대]]를 창설해 식민지 전쟁에 선봉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