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용호동(부산) (문단 편집) == 동 명의 유래 == 한 가운데에 작은 호수가 있었고 그 곳에 살던 용이 하늘에 오르지 못해서 '''용호동(龍湖洞)'''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출처 부산역사문화대전] 용호동이라는 지명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04년이고, 한동안은 용호동보다는 분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용호1동과 용호3동) 원래 이곳은 조선후기에 부산에서 소금을 제일 많이 생산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원래 분개(盆浦)[* 한자음 그대로는 분포라고 읽는다.]라고 불렀는데, 분개는 소금을 굽는 동이를 뜻하는 '분'에 갯가(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 붙은 말이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에 영도 남항동에서 제염사업을 하던 시라이시 우마타로(白石馬太郞)가 본격적으로 이곳을 장악하면서, 시험제염 용호출장소(試驗製鹽 龍湖出張所)가 설치된다. 이 때 용당동의 이름을 참고하여, 염전호수가 있는 곳이라 해서 용호동이라는 이름이 탄생한다. 우마타로는 자신의 형제 시라이시 간지로 (白石漢次郞)와 함께 총독부를 끼고 기존 조선인들의 사업권을 뺏었다. 당연히 시라이시 형제 외에도 부산을 근거로 상당한 부를 모은 호시노 쇼타로(星野政太郞)라는 동양수산신문의 대표도 여기에 끼었다. 이때부터 용호동이라는 명칭이 분개라는 지역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현재 분포라는 지명은 [[분포로]]나 [[분포초등학교]]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용호동은 한동안 부산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소금을 생산했다. 하지만 이후 [[동국제강]] 등이 세워지면서 바다 앞을 막기 시작하자, 1967년을 마지막으로 소금생산은 중지된다.[* 출처1. 부산의 옛 고갯길, 일간리더스, 2016-12-07. 출처2. 낙동강문화, 그 원류를 찾아서/배승원 지음/청하/1984』144-148p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